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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olli Aug 17. 2022

한국인이 좋아하는 속도를 포기하라니!

한국에서 생활할 때 나는 분 단위까지 쪼개 쓰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에서 호기심 많고 하고 싶은 일 많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사는 방법을 터득한다.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고 야근도 종종 하면서,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대형 서점에 가서 트렌드를 살폈으며, 운전할 때는 외국어 회화를 틀어 놓았다. 퇴근 후 자기 계발을 위한 온갖 종류의 학원에 등록하기도 했고(출석했다고는 하지 않았다. 등록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으니까). 주말에는 한 주도 빠짐없이 산에 갔다. 프로 참석러로서의 역할은 더욱 중요했다. 모든 술자리에 반드시 참석하여 2차, 3차를 외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업이었다.


스스로 바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특히 주변에서 ‘너는 참 바쁘게 사는구나’라고 이야기해주면 실제로 시간을 값지게 보내고 있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막연한 뿌듯함을 느꼈다.


‘하루에 4시간만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를 늘 입에 달고 살았다. 있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며 명함에 찍히는 직급이 변했고, 월급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달라졌지만, 그 시간이 사람을 성장시켜주지는 못했다. 나이가 권력인 한국 사회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흘러가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나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끄럽다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반면 이곳 리장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


처음 도착했을 당시에는 인터넷 쇼핑몰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고, 신라면을 사려면 무려 8시간이 걸리는 야간 기차를 타고 옆에 있는 큰 도시로 가야 했었다. 신라면 구매에 걸리는 시간 1박 2일. 운 좋게 집 근처에 있는 매장에서 냉장고를 손쉽게 구매하고 매우 기뻐했으나 그 냉장고를 배송받는 데에는 무려 2주일이 걸렸다. 


또한 몇 시 몇 분이 아니라 오전, 오후로 시간을 이야기하는 현지 사람들과 약속을 잡는 일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정말 힘든 일이었다.


외국의 언어, 음식 등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은 예상했으나, 주문했으나 오지 않는 물건과 약속했으나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에 적응하는 기간은 내 계획 속에 없었다. 


김치만큼이나 ‘한국인이 좋아하는 속도’가 그리웠고, 리장에 정착한 지 반년 만에 ‘복장이 터진다’는 표현을 태어나서 지금까지 써왔던 횟수보다 더 많이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왜 이 사람들은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을까?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며 지내다가 지금껏 시계랑 달력으로 배웠던 시간을 몸으로 배우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그건 사냥꾼 허씨 할아버지를 만난 날이었다.

고급 등산화, 배낭, 스틱까지 챙겨간 나와 다르게 어르신의 준비는 단촐했다. 정글도 & 카세트 플레이어


봄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던 어느 날, 허씨 할아버지와 함께 옥룡설산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는 아름다운 평원을 찾아 길을 나선 적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사냥꾼으로 살아오셨다는 할아버지는 사냥꾼 직업을 가지신지 ‘몇 년’이나 되셨다는 내 질문에 ‘평생’이라고 쿨하게 대답하고는, 앞장서서 산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본인 어렸을 적에는 설산에서 호랑이도 보셨다는 분. 일흔을 넘긴 연세에 작은 정글도 하나를 들고 설산을 종횡무진 다니시는데, 어르신에 비해서 젊은, 아니 어린 나는 그 뒤를 네 발로 기면서 아등바등 쫓아가기에 바빴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면서 이 분이 바로 글에서 읽었던 ‘축지법’을 쓰시는 도인이라 확신했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빨랐다. 나도 산에 꽤 열심히 다닐 때였지만 도인님의 스피드는 사람의 속도가 아니었다.

‘빠르다…’ 한국인은 박수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그렇게 바쁘게 본인의 ‘일’을 하시던 어르신은 작은 평지만 나오면 갑자기 목에 걸고 계신 구형 플레이어로 음악을 틀어 놓고 혼자 춤을 추기 시작했다. 혹은 갑자기 앉아서 하염없이 어딘가를 쳐다보시기도 했다. 그건 더 중요한 그분의 ‘일’인 것 같아서 감히 출발하자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나는 바쁘고 급한데 어르신은 느렸다. 

'갑갑하다...' 한국인은 이유 없이 매우 불안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허씨 할아버지와 나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사는 사람과, 시간에 안겨서 사는 사람이 한 공간에 있어서 어색했다.


시간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했지만, 본디 시간은 나 같은 얼치기에게는 절대 관리되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허씨 할아버지는 마음으로 시간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우스갯소리를 덧붙이자면 ‘신비체험 믿거나 말거나’에 출연해서(그런 프로가 있다면) 오늘의 사건을 증언하고 싶어 졌다(그런 프로에서 굳이 나를 부른다면). 이 우주에는 시간과 공간을 무한대로 확장시키거나 축소시키는 힘이 존재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지금 이 손이 눈에 보이지만 사실 이 손은 없는 것이에요. 기운이 참 좋으시네요’라고 말했던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도 궁금해졌고, ‘시간은 흐르는가’에 대한 물리학적 연구는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도 궁금해졌다. 


하여간 그날 이후로 나는 서서히 이곳의 시간에 적응하게 된 것 같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원하는 일에는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꾹꾹 눌러서 어느 누구보다 느리게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 봄 매화, 가을 구절초를 보기 위해 정확한 날짜를 맞춰 지리산으로 달려갔지만 리장에서는 아무 때나 슬렁슬렁 뒷산으로 마실 나간다. 

제철 꽃구경 미션을 클리어하듯이 떠나는 산행보다, 아무 계획 없이 오늘은 어떤 꽃, 풀, 나무를 만날까 기대하는 산행이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또한 반드시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는 죄책감이 아니라, 내일 일을 오늘 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니 매우 보람찰 뿐 아니라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기심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여유롭게 바쁜 일상. 


느린 속도로 천천히… 하지만 24시간이 모자라게 부지런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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