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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olli Oct 11. 2022

차마고도의 소수민족은 이렇게 품을 나눕니다

"사장님, 겨울 휴가는 최소 일주일 이상은 주셔야 합니다. 그게 제 조건입니다."


이곳 리장에서 한국 식당을 운영할 때 함께 일하고 싶어 했던 한 직원이 나에게 취업 조건으로 내세운 건 겨울에는 본인이 정한 날짜에 자유롭게 쉬겠다는 것이었다. 월급은 상관없다고 했다. 또한 봄, 여름, 가을에는 휴가가 없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주방에서 직원 한 명이 빠지면 다른 직원들이 많이 힘들 뿐만 아니라 형평에 맞추어 다른 직원들도 똑같이 휴가를 보내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녀가 취업 조건에 대해 결코 물러설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우리 동네의 ‘샤주커’ 문화 때문이다. 샤주커(杀猪客)는 말 그대로 ‘돼지를 잡아 손님을 초대한다’는 뜻

매년 11월 말부터 현지 소수민족 친구들한테 오는 문자 알림으로부터 시작되는 마을 잔치는 장장 두 달여간 계속 된다.  "우리 집 샤주커는 **월**일이야, 그날 꼭 와야 해!"



리장에 살게 된 이후 나는 거의 매년 여러 샤주커에 초대를 받았다. 

한 자리에서 젓가락을 놓지 않고 무려 9시간 동안 술과 고기를 계속해서 흡입했던 나의 영웅담(?)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잔치집의 분위기를 한껏 돋워줄 수 있는 게스트의 자격을 인정받은 결과인 듯싶다.


또한 식당 운영 당시 직원들은 나(=사장님)를 초대하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언듯 보면 예의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사장의 반복된 행동 패턴이 읽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장은 우선 전 직원과 함께 낮에 '잠시' 잔칫집에 들리기로 계획한다. 오후쯤 잔치의 흥에 푹 빠진 나머지 '나 일 안 해!'를 외치며 저녁 장사는 접자고 한다. 전 직원이 갑자기 유급 휴가를 즐긴다. 이런 식의 전개가 수차례...

함께 하던 직원들에게 샤주커 날은 여러모로 즐거운 기회가 넘치는 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장 입장에서는 고기가 넘쳐나는 직원 회식을 (공짜로) 제공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으니 이 또한 윈윈이 아닐 수 없다.

본인 식당 접고서 남의 잔칫집 와서 고기 굽는 그 사장님


잔칫날에는 점심 무렵부터 초대받은 손님들이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모두 양손에 선물을 가득 들고 오는데 맥주, 음료수, 식용유, 계란 한 판 등이 인기 품목이다. 

집주인이 먹을 것을 준비했으니 마실 것은 우리가 준비한다는 손님들의 마음이 모여 집 마당에는 마치 마트를 연상시키는 물건들이 가득 쌓여간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시족(현지 소수민족) 스타일의 바비큐 판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두어 시간쯤 고기를 즐기다가 더 이상 위장에 고기 들어갈 공간이 없다 싶어 자리를 뜨려 할 때 집주인은 손님들을 다른 테이블로 데리고 간다. 

놀라지 마시라. 지금까지 먹었던 고기는 그거 애피타이저였을 뿐. 이제부터 ‘정찬’이 나온다. 집주인의 성의를 생각해서 정찬까지 골고루 먹어야 한다. 


정찬까지 클리어한 후 비로소 자리를 뜨려고 하지만 이 또한 불가능하다. 이른 점심에 와서 늦은 저녁까지 먹고 가야 하는 것이 이곳 국룰 아니 민족룰. 손님들은 두어 시간 후에 다시 식사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에는 마을 산책하기, 마작 즐기기, 그냥 점심부터 저녁까지 움직이지 않고 계속 먹기 등이 있다. 


불쇼는 기본


샤주커 날의 돼지는 대부분 각자의 집에서 직접 기르고 직접 잡은 것들이다. 좋은 사료를 먹이며 정성스럽게 키웠다는 주인의 자부심 넘치는 이야기를 듣기 전이라도 일단 한번 먹어보면 여느 마트에서 파는 고기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샤주커에 처음 초대받아서 가면 이 잔치의 주인공인 ‘돼지’에 감동하게 된다. 하지만 몇 년간 참석하다 보면 그 잔치의 핵심은 바로 돼지가 아닌 ‘사람’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품앗이'가 없이는 진행될 수 없는 잔치 문화.


장정 여러 명이 함께 땀과 피에 흠뻑 젖으며 몇 시간을 보내야 비로소 돼지는 상에 오를 준비를 마칠 수 있고, 그때부터는 더 많은 일손이 필요하게 된다. 돼지다리는 현지 스타일로 바람에 말리며 하몽을 만들고 창자와 피는 잘 모아서 순대를 만든다. 구이용, 탕용, 볶음용 부위들이 자연스럽게 나눠지고 이 모든 과정은 매년 반복되면서 익숙한 손들이 모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적게는 몇십 명에서 많게는 몇백 명까지 모이는 잔칫날, 겉으로 보기엔 집집마다 손님을 초대하는 행사이지만 사실 이는 마을마다 손님을 초대하는 행사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갓 잡은 돼지의 다양한 부위를 직화구이로 즐기는 중


우리 예전 농촌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정겨운 풍경, 돌아가며 품을 나누고 더 정확히는 마음을 나누는 모습.

내가 샤주커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서로 간의 정과 그들이 함께 지속시키고 있는 그 공동체 문화에 감동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사라져 가는 '우리'에 대한 아련함을 느끼기 때문인 듯도 싶다.




앞에서 말한 직원과는 ‘12월 자유 휴가 5일’로 극적인 노사 합의를 하였으나, 그녀의 인맥의 넓이와 정의 깊이는 5일로 채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한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그녀는 식당을 떠났으며, 대신 겨울 내내 잔칫집에서 여러 번 그녀를 마주칠 수 있었다. 


모든 집이 본인 집인양 앞치마를 매고 손님을 맞는 그녀의 표정은 밝았고, 모든 집이 본인 집인양 벨트를 여유 있게 조절하고 고기를 뜯던 내 표정 또한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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