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직서 내겠습니다.
나의 퇴사 소식에 직장 동료들의 반응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안돼! 회사 밖은 지옥이야!”, “부럽다… 나도 데려가라…”
하지만 이어진 질문은 거의 비슷했다. “거기 가서 뭐해 먹고 살 건데?”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떡볶이 팔려고요”였다.
참 우습게도 회사에서 사업계획서를 작성할 때는 긴 시간을 들여서 내년은 물론이고 5년 이후의 장기 계획까지 세우느라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는데, 정작 나 자신의 사업계획서는 만들지 못했다. 단지 ‘리장에서 떡볶이 장사를 해야겠다’ 정도의 계획만 있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사업이 가능하다고?
중국 대도시와 달리 리장은 아직까지 정겨운 풍경이 남아있는 동네이다. 시장에 가면 동네분들이 편안한 복장에 마치 대물림된 듯한 낡은 시장바구니를 메고 장을 보시는데, 마치 우리 예전 시골 장터를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이다. 그리고 한국 돈 만원이면 육류와 과일을 포함한 장보기 플렉스가 가능한 물가.
그런데 그 소박해 보이는 동네분들이 시장을 나와서는 벤츠나 아우디를 타고 유유히 사라지시곤 했다.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니 나 같은 평범한 직장인은 꿈도 못 꿀 고급 세단이 길에 많아도 너무 많았고, 몇몇 현지인들은 씀씀이도 굉장히 컸다. 외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큰 자본의 파도가 지금 리장에서는 넘실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현지 시장 물가는 한국에 비해 상당히 저렴했지만, 관광객들이 찾는 리장 고성(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의 물가는 서울 강남보다 비쌌다. 고성 밖에서 볶음밥, 국수 등의 한 끼 식사는 천오백 원 정도였지만, 고성 안에서의 맥주는 한 병에 만원이 넘었다. 중국 여러 도시를 다녀보았지만 리장은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시골 마을만이 가진 매력이 있는 동시에 경제의 움직임은 독특한 동네였다.
한편 이곳은 중국 서부의 끝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이다 보니 전반적인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고, 한국에서 살던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직은’ 없는 기회의 땅이었다. 이곳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금의환향하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한식 세계화가 트렌드라던데…
자, 이제 무슨 사업을 할 것인지만 결정하면 된다.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네이버에는 차마고도 관련 정보나 여행 관련 글들만 있고, 실제 생활과 관련된 글들은 없어서 주로 구글과 바이두(중국 포털 사이트)의 힘을 빌렸다.
그러다 찾아낸 고급 정보!
뉴욕 타임스퀘어, 그 비싸다는 광고판에 ‘Welcome to Lijiang'으로 24시간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이명박 정부가 ‘한식 세계화’를 국책사업으로 정하면서 언론에서도 연일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을 때였다. 정부 주도의 ‘떡볶이 연구소’가 운영되고, 영부인이 직접 챙기는 (무엇을 챙겼는지에 대해 이후에 밝혀져 국민들은 당황스러웠지만) 중요 사업이었다. 유명 광고 감독과 국민 예능 무한도전이 함께 만든 비빔밥 광고가 타임스퀘어에서 송출되는 모습은 전 국민의 국뽕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니 근데 대한민국 9시 뉴스에 나오는 그 타임스퀘어 광고를 이 작은 시골 동네에서?
그러니까 ‘웰컴 투 차이나(웰컴 투 코리아)’도 아니고 ‘웰컴 투 윈난(웰컴 투 전라남도)’도 아니고 웰컴 투 리장(웰컴 투 구례군)’으로 광고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리장시는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럴 수 있지?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리장의 재래시장에서 설계했던 내 가설을 뉴욕에서 다시 한번 확인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한국에서 지금 나 밖에 없다는 자부심이 생기면서, 주식 리딩방에서 힘들게 고급 정보를 획득한 것 마냥 득의에 찼다. 이 정도면 무조건 올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퇴직금이라는 든든한 백이 있었다.
당시 리장은 한국인을 매우 환대하는 분위기였다. 택시를 타고 한국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면 기사님이 한국 사람 처음 본다면서 운전을 멈추고 악수를 청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국 식당은 한 곳 밖에 없었다. 나는 서울과 뉴욕을 넘어서 차마고도에서 한식을 알리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무역로에서 떡볶이를 전파할 생각을 다 하다니, 마치 한식 세계화의 첨병이라도 된 듯 양 어깨가 무거워졌다.
모든 결심은 끝났다.
단 한 가지 작은 문제는… 당시까지 나는 떡볶이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떡볶이를 제외한 다른 음식은 여러 번 만들었지만... 이를 통해서 요리 전 분야에 걸쳐 ‘상당히 소질 없음’이 주변에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거기 가서 뭐 해 먹고살 건데?" 질문에 "떡볶이 팔려고요"라고 대답하는 나를 보며, 표정 관리하느라 힘드셨던 지인들께 이 기회를 빌려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싶다. "사실 저도 뭔가 찜찜하긴 했어요."
그리고 갖은 우여곡절 끝에 몇 년 후 나는 정말로 리장에서 떡볶이를 파는 한국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