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작가의 펜을 꺾는다는 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과거와는 달리 의미심장하게 쓰이는 이 말은 사실 『사서(四书)』를 포함해 중국과 당에 가장 위협이 되는 글을 쓴다고 평가받은 옌롄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펜을 쥐고 글을 써내려간 순간부터 문단의 관심을 받았고 이와 동시에 당의 모든 관심을 받기도 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관심으로 인해 펜이 꺾일 뻔한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 중국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지식인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국가였다.
이 책에 대한 서평에 앞서 사서에 굳이 한자 표기를 붙인 이유는 이를 읽지 않으면 제목을 다른 의미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표지를 눈여겨보지 않고 책을 펼쳐 '직업으로서의 사서를 말하는 게 아니었나?'하고 부끄러운 착각을 하고는 했다. 나중에 표지를 다시 보니 四书라고 대문짝만하게 적어놨음에도 말이다.
네 권의 책, 이름 그대로 소설은 네 권의 책을 기반으로 스토리를 풀어낸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후에는 다소 당에 비판적인 목소리이자 마주하고 있는 참혹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로, 하나는 상부의 지시로 써내려간 비열한 밀고록으로, 그리고 하나는 신화와 철학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 화자는 누구인가,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불명확한 상태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눈에 그려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군중 속에 뒤섞인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화자를 맡고 있기에 독자는 군중의 눈으로 낮은 위치에서 펼쳐지는 모습을 직관할 수 있게 된다.
당은 당대 최고라고 불리는 지식인들을 모두 모아 황허 강변의 99구라고 불리는 강제노동수용소에 그들을 배치해 놓는다. 거기에서 지식인이라 불렸던 이들은 한순간에 가장 낮은 강제노역자의 위치까지 떨어지게 되고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나중에는 그곳에서 나갈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마지막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최악의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의 주제는 인간성의 상실과 회복이다. 지식인이라고 불렸던 이들이 최악의 환경에 등 떠밀리면서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가. 스스로가 시대의 지성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던 인물들이 수용소를 빠져나갈 수 있는 포인트인 꽃을 준다는 소리에 타인의 실수를 찾고, 밀고하기 위해 더러운 짓을 불사하는 모습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와도 같아 독자로 하여금 헛웃음을 유발하게 한다.
특히나 이런 웃음에는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전개 방식도 한몫을 한다. 구역 어딘가에서 남녀가 몰래 동침하는 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이들이 이를 밀고하기 위해 밤 중에 침소에서 나와 구역을 사방팔방 뒤지기 시작한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그려내는 그의 실력에 나는 그들이 극한의 상황에 내몰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고, 결국 작게 웃었다.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지. 붉은 꽃을 받기 위해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기를 자처하는 이들을 누가 지식인이라고 불러줄까.
이후 기근이 오면서 붉은 꽃을 향한 경쟁은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바뀌고 그들이 마지막까지 지켰던 신념마저 생존 앞에서는 무너지게 된다. 성화를 짓밟으면서까지 밥을 달라고 하는 종교인, 동료를 밀고하는 작가, 그들을 관리하는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하는 지식인들. 처음에는 유머러스하게 느껴졌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살갗을 찌르는 것처럼 날카롭게 변하고, 여기까지 이야기의 끈을 쫓아온 시점에서 웃을 수 있는 독자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 또한 너무도 적나라한 묘사에 몸을 비틀며 읽었으니.
『사서(四书)』를 읽고 있으면 떠오르는 중국의 사건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문화대혁명이다. 당대의 지식인들을 탄압하고, 당에 충성하는 이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최후에는 사회 모든 것들이 퇴보하고 살기 힘든 세상이 오는 그림까지. 옌롄커는 소설을 통해, 소설 속의 책을 통해 우회적으로 중국의 문혁을 비판했고 이로 인해 이 소설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할 뻔했다. 과거와 달리 세계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기에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 빛을 보게 되었지만 말이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안타깝지만 중국의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 여전히 목소리가 큰 인물 아래 당이 뭉쳤고 많은 지식인들이 당의 관리 아래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환경이 이어지고 있다. 닭이 울어서 아침이 오는가, 닭이 울지 않아도 아침은 오는가.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침 해를 기다리며 우는 닭이 있기에 아침이 올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목소리가 밟히고 있지만 그래도 옌롄커와 같은 작가들이 있기에 느리지만 해는 지평선 위로 올라올 수 있다.
피로 밀을 키워 당에 충성하는 이가 있다면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당, 중국이라는 작은 개념에서 벗어나 깨어나는 이가 있다. 미래에는 중국에서도 그의 소설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60~70년대 대륙에 큰 상처를 낸 사건의 여파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지만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듯 그들의 긴 밤도 언젠간 끝날 것이고, 긴 밤의 끝에 중국의 문호라 불렸던 거인이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