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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D&C북스

라이트문예, 장르의 흥망성쇄에 대해

by 카레맛곰돌이

라이트문예, 이 글을 읽는 이들 중 대다수가 듣도보도 못한 용어이리라 생각한다. 사실 40대 이상이라면 애초에 라이트문예의 라이트를 담당하는 라이트노벨조차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그때는 순수히 한국 판타지와 무협 시장이 작지 않던 시절이었고 모두 그런 작품을 읽으면서 자라왔으니까. 라이트노벨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장르문학 시장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려고 한다. 장르문학의 첫 부흥기는 PC통신 시대였다. 나우누리, 하이텔, PC통신 시대라고 정의되는 시절 국내에는 새벽을 기다리게 만드는 명품 환상문학 작가들이 다수 나타났다. 아, 참고로 새벽을 기다리게 된다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물리적인 새벽이었다. 그 시간대에 연재되는 소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의 웹소설 작가들처럼 인터넷을 통해 연재를 해왔고 그들의 소설을 묶여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읽으며 자라온 세대가 현 40대 전후의 성인들이고. 국내 판타지 시장이 시들해질 때 일본에서 라이트노벨이라고 불리는 경소설이 유입되었다. 시작은 신전기 장르의 소설들이었을 것이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일본식 어반판타지인데 이게 당시 꽤나 유행했었다. 국내에는 양산형 판타지 소설이라고 불리는 똑같은 구조에 주인공 이름만 조금 바뀐 수준의 소설이 시장에 풀리면서 질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넘어온 작품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문장 퀄리티에 일본 특유의 감성을 가진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니까. 물론 일본에서 흥행한 좋은 작품을 선별해서 가져왔을테니 기존의 수준 이하 소설과 비교할 수는 없을테지만, 독자들은 그런 요소까지 고민하지 않기에 장르는 흥행가도를 밟았고 당연히 국내 판타지 시장은 라이트노벨에게 밀려 쪼그라들었다. 이전 수준 이하로 말이다.


이에 대해 일색이 짙은 일본의 작품들을 학생들이 읽을 수 있게끔 방치하는 게 올바른 교육이냐, 이런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와 별개로 라이트노벨은 흥행가도에 올랐고 훌륭한 소설부터 싸구려 소설까지, 닥치는대로 소설을 가져오다 이제는 한국형 라이트노벨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쏟기도 했지만 해가 중천까지 올랐다면 다시금 산등성이 너머로 내려가는 법, 결국 라이트노벨 시장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한국 시장에서 밀려났다. 사유는 하나, 작품성이었다. 훌륭한 판타지 소설로 시장이 커지고 양산형 판타지 소설로 시장이 축소되어 다른 장르에 밀린 것처럼, 훌륭한 라이트노벨이 시장을 키웠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라이트노벨이 시장을 축소시켰다. 거기에 10년도 중순 이후로 성장하기 시작한 웹소설 시장도 그들을 빠르게 밀어냈다. 한국형 라이트노벨을 만들자는 각고의 시도에도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는데 한국형 웹소설이 라이트노벨 시장을 밀어낸 것이다. 라이트노벨의 문체를 가져온 작품들로 말이다.


그래서 이 긴 이야기 속에 라이트문예는 어디쯤에 위치해있는가. 라이트문예는 10년도 초순에서 중순으로 넘어가는 시기, 사실상 장르의 황혼기에 나타났다. 틀에 박힌 학원 장르, 판타지적 요소,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하든 사랑해주는 수동적인 히로인, 양산형 판타지처럼 양산된 라이트노벨 시장 속에서 독자들은 어느정도 문학적 소양을 지닌 작품들을 찾았고, 라이트노벨의 문체를 가졌지만 문학적 수준이 높은 작품들을 정리해 라이트문예라고 칭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사실 라이트문예는 장르가 아니다. 말하자면 독자들이 붙여주는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딱지였다. 그리고 오늘 다루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도 그 딱지를 당당하게 받은 작품 중 하나였고.


이 작품은 고서당을 운영하며 발생하는 사건을 하나씩 해결하는 추리,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이다. 주인공은 모종의 사유로 책을 읽지 못하게 되었고, 그런 와중 타인과의 소통 능력은 떨어지지만 책 이야기만큼은 즐겁게 할 줄 아는 고서당 주인, 여주인공을 만나게 되면서 점차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고 고서당에서 함께 일하며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가 주된 흐름이다. 작품은 일자형 패턴으로 어렵지 않게 전개된다.



책에 관련된 사고가 생기거나 의뢰가 들어옴. - 책과 관련된 일이라면 훌륭히 해결하는 여주인공이 사건을 맡음. - 책에 대한 지식을 풀어내면서 사건을 해결함. - 모두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이야기가 마무리됨.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패턴을 반복, 고수한다. 애초에 그들은 전문 탐정도, 사회적으로 수사권한이나 사건을 마주할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아니기에 이런 패턴이 아니라면 탐정 역할을 자처할 권리조차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고정된 패턴을 반복한다고 해서 작품이 재미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음에도 최대한 다양한 구도로 보이게끔 이야기를 이리저리 잘 비틀어 표현해낸다. 그렇기에 독자는 지루하다는 감정을 느끼거나 언제까지 같은 패턴을 반복할건지 의구심 없이 작품을 받아들이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 이런 형식은 굉장히 집필하기 좋은 형식으로 보인다. 다른 패턴의 시나리오를 구성할 필요 없이 원패턴을 고수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런 방식은 보기에만 좋은 방식이지 실제로는 작가의 역량 차이가 확연하게 보이는 방식이다.


지난 3월 독서 리뷰/프리뷰를 보면 원패턴을 고집했고 초반에는 좋았지만 중반, 후반으로 갈수록 지루함이 심해져 혹평했던 소설이 있었다.『변두리 화과자점 구리마루당』시리즈였다. 해당 소설은 실제로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시리즈가 유명세를 탄 이후 출간된 소설이었다. 즉 당시 유행하던 장르의 영향을 어느정도 받아 집필된 소설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시리즈가 일본에서 유행한 이후로 이 소설과 비슷한 스타일로 집필된 소설이 다수 있었다고 한다. 고정된 공간에서 추리소설의 색채를 띄고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소설들이 말이다. 지금 와서 해당 장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지금 다뤄지는 작품 말고 호평받는 작품들이 많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보면 아류작들은 신통치 못했던 모양이다.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런 스타일이 'easy to learn, hard to master'의 전형이었으니.


물론 이 작품이 끝까지 내내 좋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특히 소설이 완결난 이후 후일담 격의 작품인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2부 1』의 경우 이야기했던 원패턴의 지루함과 독자들이 원치 않는 이야기가 담겨진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화자가 남주인공에서 여주인공으로 바뀌고 남주인공이 후일담에서는 간접적으로 얼굴을 비추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니 둘의 이야기를 기대하는 팬들의 입장에서는 불만족스러웠으리라. 이런 생각이 판매고에도 이어진걸까. 이후 일본에서는 2권, 3권, 후일담 이야기가 더 나왔지만 국내에는 출간되지 않았다. 사실 이는 판매고와 더불어 국내 도서 시장의 변화가 영향을 줬으리라 생각한다.


국내에 첫 소설이 출간되고 유명세를 탄 때가 2013년이었다. 당시 라이트노벨 시장은 황혼기에 가까웠지만 이 책은 많은 이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유행하게 되었고 라이트노벨을 즐겨 읽는 독자부터 그렇지 않은 독자한테까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후 소설이 완결난 시기가 2017년, 후일담 격의 소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2부 1』이 출간된 시기가 2019년 중순이었다. 출간 기획부터 번역까지의 속도를 감안해도 늦은 시기였고, 이와 별개로 국내 장르소설 단행본 시장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판매고를 올리는 소설들은 웹소설이 단행본화된 소설들, 혹은 과거부터 유명세를 이어온 라이트노벨밖에 없었고 전반적인 장르소설 자체가 침체를 겪고 있었다. 거기에 라이트노벨을 즐겨 읽던 독자들은 시장의 흐름에 따라 웹소설 시장으로 몸을 옮겼으니, 무너진 시장에 독자를 잃은 상태로 발을 담군 것이다.


그렇게 출판사는 냉담한 시장 반응을 얻었고 그대로 다음 도서에 대한 출간을 멈췄다.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분명 2권, 3권이 나왔어도 여전히 냉담한 시장 반응을 얻었으리라. 책이라는 물건은 굉장히 고전적이고 유행의 영향을 덜 받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굉장히 트렌드에 민감해야하고 지금의 유행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유행이 올 것인지에 대해 많이 고민해야 하는 물건이다. 당시 이 소설은 라이트노벨 독자층이 남아있던 황혼기에 나타나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미 시장이 끝난 시대에 돌아와 냉소를 받았다. 작품성으로만 이야기하면 여전히 읽을만한 훌륭한 작품성을 띄고 있음에도 말이다. 독자들에게 읽히지 않는 책은 잘 쓰여지지 못한 책이어서가 아니고,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는 책은 잘 쓰인 책이어서가 아니다. 나는 명작을 이렇게 분류하고는 한다. 명작에는 시대를 거스르는 명작과 시대의 흐름을 탄 명작이 존재한다고. 도서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바람을 받은 연처럼 날아오를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한 시대의 끝과 새 시대의 시작 지점에 발을 걸친 이 소설은 그런 세일즈 포인트를 정확히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과거 재미있는 소설이었고 참신했다, 이정도 정리를 넘어 이제는 새로운 정리 멘트를 한 줄 추가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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