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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레맛곰돌이 Jul 14. 2024

20. 『책의 엔딩 크레딧』, 그리고 『소설 만세』

거기에 「포드v페라리」까지

 최근 어린 시절 블로그에 올렸던 소설들을 다시 읽었다. 풋풋하고 신선한 냄새가 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봐도 그렇지만은 않았다. 예컨대 베이비파우더와 같은 고소하고 달콤한 분내, 정제되지 않은 사람과 글에서 나는 그런 냄새가 날 거라 생각했는데 당시의 나는 이미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아직도 희망, 꿈, 목표, 귀로 들어도 그려지지는 않지만 마음을 채워주는 그런 단어를 좋아한다. 왜 정비사 일을 계속했지?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왜 군생활을 계속했지? 나 혼자 자립하고 가정을 이룰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으니까. 왜 전역을 하고 글을 쓰고 있지? 이 길에 내가 이루고 싶었던 꿈이 있으니까.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러지는 않았다. 그냥 좋은 글을 쓰고 싶었고, 당시에는 그 장르가 소설이었을 뿐이었다. 그 후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이 마음의 정체를 알았다. 좋은 책을 만들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잘 읽었다는 상투적인 칭찬이 나오는 좋은 책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 꿈은 소설가가 되어야만 이룰 수 있는 꿈이 아니었다. 그래서 책을 만들지만 보이지 않는 스태프들, 자신을 전문가라고 스스로를 되뇌며 일구일생의 마음으로 사는 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최근에는 소설을 쓰지 않는다. 전역 후에 다시금 써볼까 몇 번은 생각해 봤는데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쓴 글을 읽으면 혹독한 비평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 문단에서는 동어 반복이 있었고, 이 문장에서는 주어가 불분명했고, 배경 묘사의 디테일을 더욱 살리면 좋겠고... 그래도 어린 시절 쓴 글이 혐오스럽지는 않다. 부끄럽지도 않다. 뭐, 중학생 치고는 그럭저럭 잘 쓰지 않았나? 과거의 나에게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 후로부터 12년, 나는 지금도 글을 쓰고 있다. 소설은 아니고 평범한 내 이야기들이다. 책이 섞인 내 이야기. 사진이 섞인 내 이야기. 삶이 섞인 내 이야기. 오늘은 두 책과 하나의 영화를 가져왔다. 책의 엔딩 크레딧』, 소설 만세』, 그리고 포드v페라리. 이 작품들에는 공통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꿈, 희망과 같은 무형적인 무언가와 현실과 나라는 지금 내 앞에 놓인 눈에 보이는 것들, 그리고 그 접점에 대한 이야기가 말이다.


 며칠 전에 나스카에 관심이 생겨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후배가 입이 닳도록 말하던 포드v페라리 생각나 늦었지만 보는 시간을 가졌다(이 자리를 빌려 안 봤지만 본척했다는 사실을 말하며 후배에게 심심한 사과를). 페라리에 대항해 르망 24시에 도전하는 포드. 이를 위해 준비한 비밀병기인 사회성 떨어지는 레이서가 점점 사회적인 인물로 변화해 가는 이야기.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 속 개인에서 팀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이상만을 쫓는 이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혔지만 꿈과 현실, 얇은 두 실을 모두 놓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보였다.


책의 엔딩 크레딧』도 소설 만세』도 똑같다. 높은 눈높이를 가졌지만 낮은 손높이를 가진 사람들, 예컨대 이상은 높지만 현실이 그 이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결국 이상을 좇기 위해서는 현실의 한 페이지를 쌓아야 한다. 소설가는 매일 손에 잡히는 대로 글을 써야 하고, 영업맨은 당장 코 앞에 놓인 일들을 실수하지 않고 처리해야 한다.


 나 또한 꿈을 품고 살던 사람이었고, 꿈을 품고 살고 있는 사람이다. 고등학생 때는 정말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군대에 와서도 정비사로서 금방 엘리트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군생활을 하며 다니던 대학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았고, 20대 초반 특유의 뭐든 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넘쳤으니까. 하지만 그 꿈이 깨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뛰어난 정비사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간단한 실수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행정처리를 할 때는 내가 놓친 부분이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업무를 할 때도 볼트와 너트 개수 세기, 와셔의 앞과 뒤를 구별해서 장착하기, 케이블이 올바르게 장착되었는지 다시 확인하기 와 같은 단순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들. 나는 이 수많은 일들을 놓치면서 배웠고, 전역할 때쯤 훌륭한 정비사가 되었지만 내가 선망하던 선배들과 같은 엘리트가 되지는 못했다.


 전역한 후에도 마찬가지다. 사이버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했기에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수록 모자람은 크게 느껴지고, 내가 해왔던 것들은 모두 전혀 다른 분야로 치부되었다. 눈은 높지만 손은 낮은 사람, 사실은 나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영화, 소설, 에세이를 모두 묶은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개인적인 능력은 있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꿈은 크지만 잔실수가 많은, 눈은 높지만 손은 낮은 화자들이 모두 나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도 그들처럼 내 길을 가고 있기에 과거에 비하면 많은 모습들이 달라졌다. 나를 I로 기억하던 친구들이 옛날하고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말을 할 정도로 말 수가 많아졌고,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이루기 위해 작은 것부터 하자는 마음으로 서평을 쓰고 있고, 이제는 내가 어린 시절 썼던 소설을 읽으면서 어떻게 쓰면 더 좋을지 자신감 있게 말하고 실제로도 더 잘 쓸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의 모든 일들이 노력을 쏟는다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건 아닌 것처럼 내가 묶은 이야기들의 엔딩도 모두 완전한 해피엔딩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많은 사건을 겪으면서 꿈에 다가서고 어리숙했던 지난날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다. 나는 영화가 보여준 액션성이, 소설이 보여준 서사성이, 에세이에서 보여준 능력과 비전이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 대신, 위 작품들을 이렇게 평가하고 싶다. 그들이 인생이라는 흙길에 남긴 발자국을 보여줌으로써 오늘도 새롭게 발길을 옮길 용기를 얻게 되는 작품들이라고. 이 작품들은 희망과 꿈, 그리고 현실 사이에서 타협하고 멈추는 이들의 이야기가 아닌 위태롭게 얇은 두 실을 잡고 나아가는 이야기라고.



 위에서부터 창작에 대한 길고 장황한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결국 나는 소설을 쓰지 않고 있다. 요즘에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쓰는 게 더 재미있어졌고, 그보다 서평을 쓰는 게 더 즐거워졌다. 그리고 위에서는 다시 쓰면 잘 쓸 것처럼 말했지만 오히려 어깨에 힘이 더 들어가서 옛날보다 가볍게 쓰지도 못할 거 같기도 하고, 그것보다 큰 이유를 찾자면 예전처럼 애절한, 그리고 지고지순한 순애가 담긴 사랑 이야기를 쓰지 못하겠다는 이유 때문 아닐까 싶다. 


 그리고 책의 엔딩 크레딧』과 소설 만세』는 기본적으로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흔들리는 도서 시장에 대한 이야기도 가미된다. 글만 써서는 먹고살지 못하는 작가와 출판 시장이 쪼그라들면서 결국 인쇄기 하나를 줄이는 회사. 현실적인 이야기였기에 읽으면서 숨이 막혔고, 내게 원래 일하던 항공 쪽에서 계속 일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다른 분들의 조언이 생각났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책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나도 책이 좋아 이 시장에 뛰어드는 사람인데.


 쉽게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한참을 헤맸고 썼던 글을 엎다가 이렇게 마무리했다. 사실 조금 더 이성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뭐, 이정도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지만 실제로 나도 이 작품들을 굉장히 감정적인 시선으로 봤고, 그랬기에 이런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더 실력을 갖췄을 때 다시금 써보자는 생각이 드는 아쉬운 주제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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