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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방이 Mar 04. 2024

D-26,25
소심한 성격? 극복한 줄 알았지만

지금은 강한 마음 단련중

소심하던

나의 사춘기에게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극심한 소심 성격에 휘둘리며 살았다. 수줍음을 많이 타고, 소극적인 태도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그 누구보다 발표를 잘 하고 싶은 아이였다. 매일 밤 홀로 상상했다. 선생님이 "누구 해 볼 사람?"이라고 하면, 손을 번쩍 들고 안경도 살짝 올려주고 당당하게 교과서를 들어 나의 기가 막힌 말주변으로 친구들을 놀래켜 주는 상상을. 집에 혼자 있을 때면, 그 상상을 직접 뱉어내며 떠들기도 했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심장박동 소리가 귓구멍까지 차 오르고 독사과라도 먹은 듯 얼굴이 시뻘개질 뿐이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즈음, 나의 통통한 신체가 비만으로 넘어갔을 때 귀여운 남자 아이들이 은근슬쩍 놀리기 시작했다. "왜 니네 누나야는 미인인데 니는 그래 생겼어?" 그런 말을 듣고 놀리지 말라고 말은 못해도, 차라리 울어버릴 걸 그랬다. 나는 수긍했다. 내가 별 대응을 하지 않으니, 그 뒤부턴 당연한 듯 나는 놀림감이 되었다.


  초등학교 내내, 신체검사날이 무척 싫었다. 매년 보건실 혹은 동네 보건소에 단체로 줄을 지어 키와 몸무게를 재는 날이니깐. 요즘은 어떤 지 모르겠으나, 그 시절의 체중계는 야박했다. 정수리에 딸깍 키를 재고 나면, 기계는 "경도-비만-입니다!"라며 우렁찬 소리로 체중에 관한 조언을 해준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고도비만이 될 수 있겠다던 그 시절 귀여운 고향 친구, 야 잘 지내니?

  그리고 체력검사날도 끔찍했다. 한 학기에 한번씩 오래달리기를 측정하는데, 운동장 7바퀸가 여튼 꽤 힘든 검사가 있었다. 아이들이 이때만큼은 신기하게도 1, 2등이 누구인지보다 꼴등이 누구인지 더 흥미롭게 지켜본다. 마치 경주 말을 걸고 소리치는 어른들처럼. 내가 꼴등일 지, 옆반 00이가 꼴등일 지.(당시 체력검사는 1반과 2반이 함께 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게, 1등이 끝날 때 몇십명의 아이들은 아직 진행 중일테고, 모두들 숨을 고르고 물을 벌컥 마신 후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는 건 늘 나였을테니. 수치심의 눈물인지, 땀인지 나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그 당시 내가 친구들이 없는 학생은 아니었고 오히려 대부분 친했기에, 친구들의 장난에 마치 괜찮다는 뉘앙스로 웃어넘겼던 것 같다.


  잘하는 것도 없고, 자신감도 없던 내가 처음으로 변한 순간은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신체/ 체력 검사날이 너무나도 싫었던 나는, 그 날을 없앨 순 없는 노릇이니 처음 내 의지로 노력이란 걸 했다. 성밖숲이라는 성주에 있던 큰 공원에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민정이라는 친구와 운동을 했다. 방학 내내 매일 함께 만나 달리고 달렸다. 오로지 꼴등만을 면하자는 마음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스스로 확신에 찼다. '아, 나 분명히 꼴등은 안 하겠다!' 

  초등학교 6학년,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젓살이 많았던 나의 신체에 티가 나진 않았을테지만, 당시 성장 기간이었던 탓일까? 8cm가 컸고, 8kg가 빠졌다. 식단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만이었기에 날씬한 몸까지는 되지 않았다. 

  어김없이 찾아온 신체검사날. 웃기게도 경도비만이나 고도비만이 아니면 그 날카로운 기계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키 재는 소리, 딸깍!만 들리고 나는 내려왔다. "살이 많이 빠지셨습니다!"라는 음성이 나오고, 주변에서 놀래주길 바랐지만 딱히 그런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다. 놀림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당시 난 충분했지만.

  그리고 체력검사날이 찾아온다. 놀랍게도 나는 여자애들 중에서 2등~3등 즘 들어왔고 6학년 친구들 대부분이 놀랬다. (나의 모교는 2반까지 있었다.) 친한 친구들이 끝나고 찾아와 지금 죽어도 좋을 정도로 칭찬을 쏟아주더라! 어린 나의 첫 도전이자 첫 성공이었다! 사실 난 꼴찌만 면하면 되었는데, 이렇게 실력이 늘었던 스스로를 바라보고 더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후 고등학교 때까지 난 오래달리기는 늘 상위권이었고 결국 고딩 시절 1등을 성공하, 내적 만족감이 미친듯이 채워졌다.) 

  

  초등학교 6학년 나의 체력과 내적 변화가 일렁인 뒤, 내 소심한 성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내 의견을 말하는 데에 부끄러움을 겪었으며, 친구들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던 소극적인 아이였다. 나와는 전혀 달랐던 어머니, 언니, 오빠는 이런 나를 귀엽지만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짜장면 시킬 때마다 자꾸 나한테 시켰다. 어머니는 분주한 척 바쁜 척 하면서, 내게 시켜달라고 부탁을 맡긴다. 그럼 나는 종이에 무엇을 시킬 지 모두 메모하고 사장님께서 물어볼 예상 질의응답까지 메모해야 전화를 걸 수 있다. 물론 그걸 써놨다고 잘 대답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중학생이 된 나에게 첫 꿈이 생겼다. 배우가 되고싶다는 열망이었다. 나도 이런 급격한 심리의 변화를 겪은 내 사춘기 시절이 신기하다.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말도 못하는 내가 배우가 되고싶어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나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 단지 그것 하나에 대한 결핍이 극심하게 컸었기 때문에 TV에 나오는 배우들이 멋있었다. 인터뷰를 하면 말을 술술 내뱉고,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이런 사람, 그런 사람, 저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그들이 존경스러웠다. 여러 캐릭터로 변하는 배우를 보며 나도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크게 품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중2때, 당시 친한 친구 두명에게 꿈을 말했다. 두 명 모두 나에게 큰 사건을 안겨주었다. 한 명은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니는 배우랑은 쫌 안 어울리고, 매니저 해보는 건 어때? 내가 안 그래도 가수나 배우 쪽 생각하고 있었거든? 내 매니저하면 되겠다!" 어색한 웃음으로 마무리 짓던 그 날은 더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다.


  다른 한 명은 반응이 아주 달랐다. "너무 대단하다! 그럼 오늘 우리 집 가서 피자 먹으면서, 같이 연기 연습 해볼래?" 나는 당시에 혼자 집에서 네이버 블로그를 띄우곤 대사 연습을 하던 중이었고, 그걸 말하니 함께 연습하면 실력이 더 늘 것이라고 말해주더라. 그렇게 나를 인정해주는 친구가 너무 고마웠고, 그날 피자를 포장한 뒤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다. 당시 유행했던 [상속자들] 드라마 2인 대사를 화면에 띄우고 우린 나란히 앉았다. 놀라운 일이 생겼다! 나는 그 집에 있던 3시간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답답한 친구가 연기하기 부끄러우면 읽기만이라도 하랬지만, 나는 입이 얼음에 붙은 듯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배우가 꿈이 아닌 친구만 대사를 읽었다. 어머나 세상에, 걔는 부끄럼도 타지 않고 잘 읽더라! 

  그 날의 나는 절망스러웠다. 나는 앞으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열등감에 파묻혔다. 그 친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사과뿐이었다. 앞으로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질 수는 없겠다며 한탄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부끄럽고, '나'로 태어난 게 미웠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화풀이라도 하는 듯 악당 대사 연기를 큰 소리로 연습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서야 변할 수 있었다.


  "니가 우째 배우를 하노... 정신 차려라! 니 우리 앞에서도 연기 못 하는데 사람들 앞에서 우째 할래?" 우리 어머니께서 중3때 내게 한 말이었다. 참고로, 우리 어머니는 막내 공주님이라고 날 부르는 착하고 사랑스럽고 든든한 어머니다. 단지, 과거의 소심왕인 내가 꺼낸 첫 꿈에 다소 충격을 받으셔서 반대를 강하게 하셨을 뿐.(어느정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난 그렇게 일년에 한번 씩, 타인의 평가가 두려워 내 꿈을 꽁꽁 숨기며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고2 때, 목구멍 끝까지 고구마가 차올랐던 나는 당시 제일 친한 친구와의 대화 이후 달라질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조언을 해주었다. 하고싶은 거 지금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그리고 지금 못할거면 앞으로도 계속 안 하게 될 거라고. 당시 그 친구 또한 조용하고 낯가리는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춤 추고 싶거나 노래하고 싶어서 학원에 다니며 공연을 하고, 미술을 하고 싶어서 미술 입시를 하던 굉장한 실행력 부자였기 때문에 좋은 영향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만에 달라지기로 결심한 나는, 그 친구 덕분에 180도 변했다.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댄스 동아리에 먼저 들어갔다. 체력은 노력했어도 유연함은 타고났었던 난 어렸을 때부터 무용을 하라던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춤에 관심이 있었다! 댄스 동아리에 일단은 들어가기만 했는데, 자신감이 솟구쳤다. 이 기세로 어머니 몰래 연극 동아리에도 들어가버렸다. 공연 전 날, 어머니에게 말했다. 혼날 줄 알았지만 차분하게 "알았따."라는 말만 하시곤 나의 공연을 보러 오셨다. 우리 가족들과 내 친구들은 크게 놀랐다. 내가 무대 위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연기하는 모습에 웃으며 박수 쳐 주었다. 그렇게 나는 급격하게 변했다. 당시 2016년, 1년동안 춤과 연극으로 20번 가까이의 공연을 넘나들게 되면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지만, 진짜 변화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쉽고 순조로웠다. 오히려 내가 지금까지 왜 이리도 겁을 먹었는 지 모를 정도로 달라진다. 고등학교 2학년 이후로, 연극영화과를 졸업할 때까지 나의 소심한 성격의 변화는 상승세였다. 

  과거에 상상하던 것처럼, 난 대학교 때 "누가 먼저 할래?"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늘 먼저 손 드는 학생이 되었다. 한 학기가 지날 때 즘, 이제 먼저 할 사람에 대한 물음에 내가 들으려는 손보다 동기들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나는 늘 당연하게 선두자 역할을 하던 당차고 열정적인 학생이 되었다! 이대로만 산다면 앞으로의 삶에 무슨 일이 닥쳐도 끄떡 없으리라는 내 확신이 점차 무너질 줄은 모른 채.


  천천히 나의 마음을 단단하게 채워가기 보단, 나는 남들의 눈치를 살피는 데 급급했다. 어릴 때보다는 거침없이 도전하긴 하지만, '이렇게 하면 더 좋아하겠지?' '제일 잘하지 못할 거라면 제일 열심히라도 해서 눈에 띄고싶어!' '지금 이 말을 꺼내면 날 이상하게 보겠지?' 작은 고민들이 때에 맞지 않게 잦아지면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에 방해할 때가 많다. 

  있는 그대로의 삶.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 그저 나로서 충분한 삶. 내면이 단단한 사람으로 되기엔 아직 부족한 채 20대의 중반을 넘어서게 되었다.


  결국 혼자 있을 시간이 아주 많아진 프리랜서 현재의 나, 굉장히 소심하다. 무엇에라도 의지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다. 그런 나의 5일차의 도전은 피팅모델에 지원해본 것이다. 어린 시절 외모에 대한 낮은 자존감으로 사진 찍는 것에 두려움이 많았지만, 지금은 사진 촬영을 즐기게 되었기에 도전하고 싶었다. 해보고 싶은 마음을 미루고 미룬 지 몇 년이 흘렀는데 D-챌린지 도전 기간을 빌미로 지원하게 되었다. 좋은 일이 생기길 바라며, 지원에 의의를 둔 채 나는 요즘 새로운 것 한 개씩 하는 내 모습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예전처럼 소심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아이라는 것에 꽤나 충격을 받은 뒤, 내가 나의 의지로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해보려는 '다시 또 새로운 성장'을 마주하고자 하는 내가 좋더라. 

  어쩌면 나는 극복해내는 그 순간의 짜릿함을 겪고 싶어서 지난 몇달간 그리도 어둡고 외롭고 지쳐있었던 걸까? 무엇이 되었든 나는 변하기를 택했다는 것. 그리고 아주 작지만 조금씩, 강해지고 있다는 것. 그것을 느끼며 오늘도 희망을 품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진정 변하는 순간은 쉽고 순조로웠던 나의 경험이 이제는 현재를 응원해주고 있다. 과거를 그리도 싫어하던 나의 사춘기에게, 지금의 나는 떳떳하지 못해서 이런 성장일기를 연재하고 있지만 과거의 너 덕분에 이제 더 강해질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고맙더라. 고마워, 나의 사춘기.



From. 윤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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