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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방이 Mar 27. 2024

D-2 아픈 날, 나 혼자일 때

강한 사람이 되려는, 나의 스물여섯 이야기



  어렸을 때부터 아픈  혼자 있는 것이 익숙했다. 초등학교  신종 인플루엔자가 유행할   또한 크게 걸려 골골 대던 날이 기억난다.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낯선 초등학생 시절,  눈과 미간에 걱정이 가득한 채로 어머니께선 출근하기를 주저하셨다.

  점심  어머니께서 전화가 왔다. 지금 제일 먹고 싶은  배달시켜주겠다고. 나는 망설임없이 중화비빔밥이 먹고싶다고 말했고, 둔해진 미각임에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조용한 집에서 나의 숨소리만 들리고 온몸이 저린  . 생생하게 떠오른다기 보다는, 어렴풋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달까. 그때 내가 외로웠던걸? 솔직히  모르겠다. 그런데 아직도 중화비빔밥을 보거나  글자만 읽어 가을 낙엽같은 외로움과 비슷한 감수성이 스쳐지나가곤 한다.


  20살때부터 지금까지 6 넘게 나는 혼자 살고 있다. 맞벌이 부모님에다가, 막내인지 언니 오빠와 나이차가 나기 때문에 애초에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한 , 20 때부터 이미 자취하는 것에 금방 적응했다. 그렇지만 유독 몸이 아픈 날에는 혼자가 낯설더라.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초등학교 신종 인플루엔자 말고는 딱히 크게 아팠던 적이 없는 내가, 갑자기 학교에서 복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주변 동기들이 당황하다 이내 침착하게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스트레스나 면역력이 약해진, 흔한 이유로 위장이 많이  좋아져서 그랬다. 그때부터였을까? 나의 위장은 날이 갈수록 약해졌다.


   따져보자면 나의 대학 생활은 아주 최고였다. 설렘 가득한 연기예술학과. 바빠도 재밌었고, 과제가 많으면 오히려 즐거움 수치가 상승했. 1학년  레포트 제출을 하는 날, 교수님께서 깜짝 놀라셨다. "이건 레포트 과제가 아니라 논문을 써왔는데?"  말에 홀렸었던  매번 과제에 열성적으로 임했다. 그래서 성적장학금도 자주 받았고, 2학년 1학기 2학기 내내  A+ 받은 스스로가 뿌듯했다. 그럼 뭐하나, 나는 감당하지 못할 스케쥴을 온몸으로 즐기고 건강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었다.


  대학교 3학년  최고로 바쁜 시기를 마주하무렵이었다. 앉아있어도 힘들고 몸이 무너졌다는 표현이 맞는 건강 최악의 순간이 찾아왔다. 대학병원 이곳저곳 다녀도 원인을 한달동안 알지 해 고통은 커져만 갔다. 그러다 우연히 비슷한 병을 가진 친구가 병원을 추천해줬고,  진단을 받을  있었다.

  살면서 다래끼 수술 말고는 해본  없는 내가 수술대에 올랐다. 아프고 로웠다. 다행이도 생명에 위협되는 병은 아니었고, 수술하면 한달 내로 진정이 되는 병이었다. 한달내내 관을 달고 지내느라 꽤나 불편하더라. 겉으론 문제없는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관을 달고, 학교에서 다시 일상을 보내는 상황에 놓인 스스로는 주변에 친구들이 있어도 외로운 싸움을 보냈었다. 나보다 아픈 사람이 세상에 그토록 많을텐데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까. 이때 이후로 심각한 질환을 극복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남달라 보이더라. 나는 이걸로도 이렇게 고독했기 때문에, 그런 분들의 말을 들을  정말 든든한 응원이 많이 된다.


  대학교 3학년을 졸업하고, 학사 학위를 다닐 때였다. 수술한지 1년즘 지났을까?  아프다. 작년의 공포가 밀려와 고민도 없이 수술했던 병원에 가보니 재발했다더라. 당일에 수술을 진행했다. 작년에는 수술 전이  아팠는데, 이번 해엔 수술하고 난 이후가 더욱 아팠다. 진통제를 매일 맞아야 겨우 버틸  있었는데, 동시에 코로나까지 확진되어 버렸다. 너무 아픈데 2주간 격리하느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약한 위장과 코로나 바이러스를 향해 미친듯이 욕을 퍼부었던  같다. 매일을 울었다. 너무 서럽고 우울했다.

  그리고 대학 과정을 완전히 졸업하고 2023년이 되었다. 졸업을 하고나니 생활이 불안정해진 청춘인 나는,매일 아르바이트를 고, 유투브를 시작하고, 브런치 작가에 합격해서 신이 나고, 취득하고 싶었던 심리 관련 자격증도 따는 일상 보냈. 무엇이든 부딪히며  사회를  살아보자는 다짐을 굳건하게 하면서! 그리고 어느날  아프더라. 착잡했다. 3 연속 수술을 한다는 것에 지쳐   지경이었다.


  2023내가 세번째로 재발하여 수술할 우울감과 패배감이 극적으로 치솟았다. 그런데 함께 만나고 있던 전애인이 한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바쁜데 어쩔  있나.  혼자  버티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아파서 골골 대고 있을  그는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더라. 그당신 난 사랑받지 못하는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애인에게 아픈데 왜 오지도 않냐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할 정도로,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속상하면 속상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이처럼 보이기 싫어서였을까.

  그래서  당시 어머니에겐 재발했다는 사실을 말할  없었다. 졸업하고 이제 경제적 독립을 이뤄야할 시점인데 또 아프다고 하기에 꺼려졌달까.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다.

  가족 중엔 언니에게만 말했는데, 오빠야한테 전화오더라. 몇십만원을 보내주며 우리 오빠걱정과 안쓰러움이 넘칠 정도로 나를 위로해주었다. 뜻밖에 오빠의 진심에 나는 펑펑 울음을 쏟아냈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당연히 있는데, 악화된 건강은 내 정신을 지배하여 외로운 동굴 속으로 빠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플  혼자 버텨야 하는 것은  외롭고 쓸쓸한 순간이다. 아프지 않아도 인생에서 고독을 느끼는데, 아플  느끼는 고독은 온갖 어두운 부정적인 사고로 변환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작년 수술 이후로 '건강' 크게 관심을 두게 되었다.

  아직 20 중반인데 해마다 있는 축제처럼 수술을 하게   없었다. 무엇보다도 더이상 아프다는 핑계로 나의 정신 또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아프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강해지기로 했다. 2024년이 찾아오고 여러 도전들을 하고 있는 지금,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의 의지에는 몸도 마음도 자주 아프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어머, 이렇게 말한  부끄럽지만, D-챌린지 기간동안 세살 버릇 여든 간다고 너무 바쁘게 나의 몸을 굴렸다. 그래서 몸살이 났다! 정신차리고 하루동안  쉬어준  새벽에 몸을 뜨끈하게 지지러 D-2 오늘의 도전은 혼자 찜질방 가기였다!


  혼자 적극적으로 삶을 살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익숙해진 요즘, 아플 때도 어떻게 나를 대해야 하는  어렴풋 알게 되었다. 나의 정신이 엄한 생각하지 도록 섬세히 살펴봐주는 요행을 부리기도 한다. 그리고 하루종일 몸살로 쉬어보니, 이튿날까지 방구석에 두기엔 심심함이 외로움으로 번질까봐 찜질방 가기를 한 것이다.


  D-30 때는 몰랐는데,   챌린지 하기를 소름끼칠 정도로 잘했다고 생각한다. 별거 아닌 순간들이 모여 나를 안정적이게 해주는 요즘이 너무 좋다.

  그렇지만 궁금하다. 내가  챌린지를 진행한다고 공표하고 유투브에 매일 영상을 올리는 , 그리고 브런치에 매일 글을 연재하는 , 매일 적어도 하나 씩만 스스로에게 새로움(도전) 부여하는 .  조합들  하나라도 하지 않았다면 내가 과연 이렇게 만족감을 느끼며 한달을 지낼  있었을까?


  나와의 약속이 중요해진 요즘, 그것을 중요하게끔 만들던 원동력은 유투브였다. 그래서 오로지 순수하게 나와의 약속이 중요해졌다고 표현하긴 어렵더라. 그리고 매일 나의 작은 감정부터  감정까지 깊이 사유하는 시간을 보낼  있었던 원동력은 브런치였다. 영상의 모습이나 내레이션의 소리가 아닌 쓰기는, 입을  다문  나의 신경을 내면에 쏟아 몰입할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평생 중에 처음으로 이리도 오랫동안 홀로 다니게 되었는데,  심심함을 달래주었던 것은   가지였다. 매일 새로움을 부여하는 .  목표가 없었다면 방황했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모든 선택과 달라진 환경도 나를 이끌었다. 오직 내 의지 하나로 근래를 보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나의 작은 선택들이 주변을 넓히게 하여, 넓혀진 주변들로 인해 나는 새로운 길을 걸어볼 수 있었다.


  어쩌면 혼자 지내는 것을 두렵지 않게 해주는 일이란, 혼자 강해지려 노력하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 나의 약한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런 나를 드러내는 것이 익숙해질 때까지 용기를 내어보는 것. 그러다 새롭게 넓혀진 주변환경이 아주 조금일지라도 나를 나아가게 해주는 것. 그것의 연속을 보내다보면, 어느새 내가 뛰어 놀 수 있는 세상이 더 넓고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From. 윤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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