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소심 어린이었던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소심해서 아무에게 말하지 못하는 목표나 버킷리스트. 어릴 적부터 나의 꿈은 배우였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를 표현하는 것. 그것이 어린 시절 가장 큰 욕구였다. 결핍되었던 자신감은 어린 시절 나를 갉아먹을 뿐이었다.
내가 꿈을 도전하기도 전부터 두려움을 갖게 되는 이유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출발하였다. 소심한 나는 겸허히 받아들인다. 아직 귀여울 정도로 적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받아들인다. 스스로의 못난 모습을. 이런 아이에게 강력한 목적의식과 문제의식을 가지게 하는 것은 너무 섣부르다. 소심이는 속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문을 쾅쾅 이 아닌, 차근차근 아주 천천히 매만져주어야 하는 것이다.
엄마는 때때로 내 아이에게 무수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 순간들을 보내곤 한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의 방법을 견주어 보았을 때, 의심스러운 칭찬은 조심하는 것을 본편에 담고자 한다.
아이도 인간이다. 본능적으로 자신만의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한 인간. 성인이 되어 다양한 그룹에서 지내보니, 이 사람이 내게 지금 진심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하더라. 자신만의 검열을 통하여 잘 맞는 친구와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를 이어나가게 되곤 한다. 이런 잣대는 아이에게도 있다. 물론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 듯, 아이들도 기준이 저마다 다르다. 소심이었던 나의 어린 시절, 그 기준이 아주 단단했다. 모든 칭찬과 인정을 의심해 버린다.
참 까다롭지 않은가? 소심한 아이는 모두 까다로울까? 놀랍게도 소심이 들은 자신을 향한 인정은 예민하지만, 남들을 향한 시선은 아주 후하다. 자신만 인정을 못하는 것이다! 이런 내게 어머니께서 늘 대하셨던 방식은 진심 또 진심을 다해 인정(칭찬)하는 태도였다.
한 번쯤은 다시 곱씹어보자. 자신이 타인 혹은 내 아이에게 말했던 인정(칭찬)이 진심인지. 그것은 진심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혹여나 진심의 전달방식이 진심을 다해서 이루어졌는지. 딱히 찔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충분히 멈칫거릴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의심이 많아진 소심한 아이에게는 진심이 전해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극소심이 초등학생 시절, 어머니와 함께 경주에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첨성대를 지나고 어느 꽃밭에서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여기 꽃이 너무 예뻐요!" 어머니는, "윤정이 마음이 예뻐서 꽃이 예뻐 보이는 거야."라고 순식간에 대답을 하셨다.
의심이 많은 소심한 나는 어찌 생각했을까? 어머니의 대답이 이상한 답변이었다. 나는 꽃이 예뻐서 예쁘다고 말한 것이지, 내 마음 따위를 예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을 품은 나는 어머니께 당당히 대꾸를 하였다. "아니에요. 꽃이 예뻐서 예쁘다고 한 건데요 어머니?"
그렇게 어머니의 진심, 또 진심을 다해 인정(칭찬)하는 방식이 뒤따랐다. "그래. 윤정이 마음이 예뻐서 그렇게 보이는 거라이까~? 엄마는 경주에 와가꼬 윤정이처럼 꽃을 보자마자 예쁘다는 생각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도 어릴 땐 꽃 보면 예쁘다 예쁘다 하고 살았는데, 우리 윤정이랑 지금은 달라져버렸노. 윤정이는 엄마처럼 말고 윤정이처럼 앞으로 계속 꽃 예뻐하면 좋겠다."
13세였던 내가, 어른이 되면 꽃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는 것과 어머니의 인생의 무게에 곁들여진 씁쓸함에 대한 비유를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 경주의 어느 꽃밭 앞에서, 어머니의 진심으로 인해 소심한 아이의 마음이 조금씩 매만져지기 시작한다.
아이에게 특별한 것을 칭찬하는 것만이 소심한 아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에게만 까탈스러운, 의심이 많은 아이의 사소한 것부터 '진심을 다해서' 인정하고 칭찬하는 게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다.
사람에게 진심을 다한다는 것은 성인이 되고 어른이 되어갈수록 쉬운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나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내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라면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해낼 수 있는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정말 간곡히 강조하건대, 작은 아이조차도 납득할 정도의 진심을 다한 인정과 칭찬이어야 할 것이다.
만일 내 아이에게 인정할 부분이 없다면? 그것은 엄마의 몫이다. 엄마의 통찰력. 위의 일화를 공개했듯이, 정말 별것 아니라 여길 수 있는 순간의 일이다. 그 일화를 10년이 넘도록 나는 마음속에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것이 소심한 아이를 잘 키워낸 어머니의 비법이라 근거를 내놓을 정도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경험이다. 큰 일일수록 물론 아이에게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지만, 큰 일만이 아이를 변화하게 하지 않는다. 사소한 진심들이 쌓여가며 특별한 어느 변화를 마주하게 되었기에, 감히 내가, 글 속에서 소리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