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기에 가장 번성한 사업은 '밀키트'사업이 아닐까. 우리 동네만 해도 동시다발적으로 다섯 개가 넘는 밀키트 가게가 오픈을 했다. 그만큼 소비자가 많다는 것인데, 그동안 그다지 밀키트를 많이 이용하지 않은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 무심코 쿠팡에서 다른 것을 구매하려고 서핑 중에 밀키트 하나가 콕하고 박혔다. 바로 '백순대 볶음'이었다. 이제 백순대도 밀키트로 나오는구나 싶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메뉴였는데 조리된 사진을 보자 급 구미가 당겼다. 마침 세일도 하는 중이어서 주문을 했다. 백순대,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고등학교 시절 지겹게 먹었던 음식이다.
나는 중학교 3학년 여름이 들어설 무렵 서울로 전학을 왔다. 당시 대전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평소 성의 없이 과학을 가르쳤던 나의 담임선생님은 엄마가 학교까지 찾아가서 딸의 일생일대의 중요한 상담을 했음에도 변함없이 관성을 유지한 채 "지금 전학시키세요"란 성의 없는 답을 해줬다. 엄마의 질문은 딸이 서울로 전학을 가야 하는데 중학교를 여기서 졸업하고 가야 하는지, 아님 지금이라도 먼저 전학을 시켜야 하는지를 물은 것이다. 당시 우리는 서울로 이사를 예정하고 있었지만 그리 급한 상황은 아니었고, 만일 당시 나의 담임 선생님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라고 했으면 얼마든지 그 시기를 맞출 수 있었다. 그런데 당장 전학시키라는 말에 엄마는 나만 홀로 서울에 있는 이모 집에 덜컹 하숙하는 신세로 전학을 시킨 것이다.
사촌 동생과 한 방을 쓰며 눈칫밥을 먹었던 것은 버틸만했다. 문제는 당시 서울은 거주지에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에 따라 고등학교를 우선 배정해주는 원칙이 있었기에 나는 당시 전학 간 중학교에서 달랑 나 혼자 이상한 고등학교를 배정을 받은 것이다.
고등학교는 내가 살던 곳에서 버스를 타고 20분가량 가야 했고, 버스에서 내려서도 걸어서 15분 이상 걸어 올라가야 하는 산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무당이 많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동네 이름이 붙여진 곳이기도 했다. 여중을 다녔던 나는 남녀공학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입학 첫날, 입학 규정에 따라 머리를 귀밑 3cm로 자른 사람은 나를 포함해 열 명도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 학교는 근방 중학교에서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의 집합소로 불리는 곳이었다.
'어떤 환경에 처했든 꿋꿋이 열심히 하면 되지 않는가'는 사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그런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주변 환경과 친구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기에 나만의 방패막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때 찾은 것이 '도서반 동아리'였다. 이 동아리는 다른 동아리와 다르게 유일하게 전교 석차 커트라인이 존재했다. 엄청나게 높은 성적을 요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커트라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학교 내에서 이 동아리의 존재가 다르게 와닿았다. 전학 오기 전 중학교에서도 계속 도서관을 관리하며 글을 쓰는 문예반 동아리를 해왔던지라 도서반 동아리는 내가 있어야 할 그곳이라 느껴졌다.
다행히 도서관 지원 심사는 무사히 통과됐고 나는 도서반 16 기수가 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서반이 교내에서 꽤 유명한 동아리인 것이 확실했다. 그 이유는 당시 14기 남자 선배들 넷이 키 크고 잘생기고 공부 잘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소위 도서반 F4로(당시 유행했던 <꽃보다 남자> 패러디) 불렸던 것. 그중 도서반 짱을 맡고 있던 선배는 송승헌 분위기가 나는 짙은 눈썹에 중저음의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애들아 모여봐"라고 눈웃음을 치며 후배들을 부르면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었다. 나는 방과 후에 그들을 매일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고, 반에서 친구들은 종종 그 오빠들 실제 모습은 어떠냐고 자주 묻고 했다. 나도 도서관에 가면 선배들이랑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그들의 실제 모습을 알리 만무했지만 그런 질문을 받는 것만으로 의기양양했다. 절대 만화같은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물론 홀로 상상은 했다.)
그리고 드디어 신입생 환영회가 끝나고 함께 뒤풀이를 하러 가는 날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신림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걸어서 가기에는 꽤 먼 거리였는데 우리 학교 학생들은 늘 하교 후 신림동 사거리(신사리)로 뻔질나게 놀러 가곤 했다. 나는 내가 살던 동네와 먼 학교를 다녔기에 신림동 사거리는 그 전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선배들과 발맞추어 신사리를 향했다. 남자 동기들과 선배들과 학교 밖에서 함께 걸어가는 것에 홀로 설렘을 느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신림 순대촌이었다. 나는 신림동이 순대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그날 처음 알았다.
건물 한 곳으로 들어갔는데 1층부터 5층까지 온통 순대가게들만 있었다. 1층에 건물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각 층 양 옆으로 마주 보고 가게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통로로 가게 주인아주머니들이 한 명씩 나와서 손님들에게 자신의 가게로 오라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 첫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모두들 걸어가는 우리를 붙잡고 "학생들 이리로 와봐, 이모네 집이 제일 맛있어. 많이 줄게"를 외쳐댔다. 나는 그들이 잡은 손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끌려가지도 못하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때 선배들이 내 손을 잡고는 "이모 죄송해요. 저희 단골집 있어요" 하면서 나를 끌고 갔다.
당시 "이쪽으로 와"라고 호객하던 이모들에 왜 그리도 불편했나 싶었는데 한참 후에 대학생이 돼서 밤늦게 친구와 놀다가 잘못 들어간 용산의 한 거리에 홍등을 밝힌 채 "이리로 와요"라고 외치던 언니들을 보고 화들짝 놀란 경험을 한 후로 어렴풋이 그때의 불편함이 오버랩된 적이 있다.
그렇게 선배들이 단골집이라고 말하는 이모네 순대집으로 가서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4명당 순대 한판이었다. 종류는 백순대와 양념 순대가 있었지만 선배들은 무조건 '백순대'가 진리라고 했다. 나는 뭐든 시켜주는 대로 받아먹겠다는 의지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갖은 야채와 순대가 불 위의 달궈진 철판 위로 얹어졌다. '차르르' 기름에 볶아지는 냄새와 모양이 꽤 그럴듯했다. 들깻가루 이외는 다른 양념은 보이지 않았기에 과연 무슨 맛일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얼추 양상추의 숨이 죽자 옆에 선배는 깻잎을 하나 들고 순대 하나와 야채들을 적당히 올리고 각자 상위에 놓여있는 빨간 양념을 얹어서 싸 먹는 시범을 보여줬다.
"이렇게 먹어봐. 진짜 죽음의 맛이야!!" 라면서 연신 쌈을 싸서 입에 구겨 넣었다. 나도 알려준 대로 똑같이 깻잎에 싸서 먹었다. 사실 나는 그전에 깻잎을 그다지 좋아하는 취향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싸서 한 입 먹자, 백 순대는 반드시 깻잎에 싸 먹어야 한다는 진리의 의미를 깨달았다.
고소하고 담백한 순대와 야채 위에 특제 양념 소스를 올려서 깻잎과 먹으면 그 조화로움이 가히 최고였다.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맛이었다. 특히 백순대는 마지막까지 가스불을 끄지 않고 약불로 계속 지글지글 뜨겁게 먹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철판에 눌어붙은 순대 잔해물을 떼어먹는 맛이 또 일품이었다. 물론 식욕이 왕성했던 우리는 마지막은 항상 볶음밥으로 확실한 끝맺음을 해줬다. 그렇게 놀랍고 위대한 백순대의 세계를 처음 영접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도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그 신사리를 우리 집 앞마당 드나들듯 다니면서 백순대를 먹어댔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누가 '백순대'란 말만
해도 그 맛이 입구멍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단 한 번도 백순대를 먹으러 신림동에 가지 않았다. 평생 먹을 순대는 그 시절에 다 먹었고, 더 이상 미련은 없었다.
그 백순대가 다시 먹고 싶을 날이 올진 몰랐다. 밀키트가 도착했고,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하는 큰 애와 둘이 점심으로 후다닥 조리해서 먹었다. "우와, 엄마 이거 너무 맛있어요!"라고 아이가 반응했다. 현장에서 먹는 맛 하고 비할 수는 없었지만 그 비스무리한 맛은 느낄 수는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가 맛있다고 해주니 나도 함께 신나게 먹었다. 오랜만에 백순대는 나의 고등학교 도서반 시절을 추억하게 해 줬다. 당시 F4선배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불현듯 궁금해진다. 참 많은 소녀들을 울고 웃게 해 줬는데 말이다. 나도 포함했다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