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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난 효녀는 못 될 것 같아.

by 세리

그날은 갑작스레 둘째 아이가 친구를 초대하고 싶다고 한 날이었다. 마침 오전에 잔뜩 혼자만의 자유를 누린 덕에 집에서 먹을 간식거리가 똑 떨어진 것도 모르고 장을 보지 못했다. 늘 가는 마트까지는 거리가 멀어서 아이에게 집 가까이에 있는 마트에 친구와 먹을 간식을 사러 함께 가자고 했다. 아이는 신이 나서 따라나섰다. 언니 없이 엄마와 단둘이서 외출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아이는 그 짧은 거리에도 달콤한 말들을 줄줄이 엮어냈다. “나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아이가 좋아하는 순위는 늘 바뀐다.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에 따라 때로는 엄마, 아빠, 할머니 그리고 언니로 수없이 바뀌곤 한다)


마트에 도착해서 아이에게 먹고 싶은 간식을 고르라고 한 뒤, 나도 저녁거리를 만들 재료 몇 가지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것저것 담다 보니 가져간 장바구니에 한 가득이었다. 거기에 마침 귤도 세일을 하고 있어서 5킬로들이 귤 한 상자도 사기로 했다. 계산을 다 하고 장바구니에 차곡히 담아 어깨에 메고 귤 한 상자까지 들고 가려니 여간 무거운 것이 아닌가. 자기와 친구가 먹을 과자 몇 개만 손에 들고 가볍게 앞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를 불러 세웠다.


“희서야, 엄마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혼자 못 들겠어. 희서가 같이 들어줘야겠다!! 이 장바구니 한쪽을 희서가 들고 엄마가 한쪽을 든 채로 귤을 안고 가면 갈 수 있을 것 같아. 도와줄 거지?”


“응, 알았어!” 그러고는 옆으로 와서 장바구니 한쪽을 들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무게보다 훨씬 묵직하게 잡히는 장바구니에 아이는 ‘낑’하면서 두 손으로 힘껏 들었다.


“엄마, 진짜 무겁다. 왜 이렇게 많이 산거야!!”


“우리 희서가 도와줄 거 아니깐 많이 샀지.. 이거 다 희서가 좋아하는 거잖아...”


아이는 더 이상 대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든다는 내색을 온 표정을 구기면서 드러냈다. 호흡을 맞춰 함께 한 발자국씩 들고 갈 때마다 아이는 계속 앓는 소리를 했다. 손이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겨우겨우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서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이는 내려놓은 짐을 다시 보더니,


“엄마, 나는 효녀는 못될 것 같아.”


“응? 뭐라고? 효녀? 우리 딸, 효녀라는 말도 알아?”


“응. 한자 선생님이 알려줬어. 여자 녀(女) 배울 때… 엄마 아빠에게 잘하는 딸이 효녀지?”


“응, 맞아. 근데 왜 효녀는 못될 것 같아?”


“왜냐하면…. 나는 엄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 같아. 그래서 효녀는 못될 것 같아.”


“하하하, 우리 희서는 엄마보다 희서 자신이 더 좋아? 왜 그렇게 생각해?”


“엄마가 무거운 거 같이 들어달라고 해서 들고 왔는데.. 솔직히 들기 싫었어. 그건 내가 엄마보다 나를 더 사랑해서 그런 것 같아. 나중에도 나는 엄마한테 잘해주는 게 힘들 것 같아. 그러니깐 미안해…”


그 짧은 시간에 아이는 내가 부탁한 짐 들어주기로 인해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말했다. 엄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들어줬지만, 자신의 진짜 속마음은 힘든 일은 하기 싫다는 것임을 깨달았고, 그래서 자신은 엄마를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누구보다 자기가 가장 소중하기에 나중에도 엄마 아빠에게 잘해주는 일은 힘들 수도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고백을 한 것이 놀라웠다.


“와, 희서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너무 놀라운데. 희서야, 너 자신을 가장 사랑해야 하는 게 당연하고 그건 누구한테도 미안한 일은 아니야.”


“진짜? 엄마도 그럼 엄마를 제일 사랑해? 우리 가족보다?”


“하하하, 물론 우리 가족을 정말 사랑하지만,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걸 점점 더 알아가고 있어. 그런데 희서는 그걸 벌써 깨달았다는 거에 놀랐어.”


“그럼 나중에 나 효녀 안돼도 돼?”


“음… 물론 희서가 효녀가 돼주면 좋겠지만,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어. 나중에 희서 너를 사랑하는 만큼 엄마를 더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효녀가 되면 되지…”


“알았어. 그래도 나 아까 저 짐 들어주기 싫었는데 엄마 사랑해서 들어준 거야. 싫어도 조금씩 도우려고 노력해볼게…”


© mathildelangevin, 출처 Unsplash




한 번은 신랑이 둘째 아이와 놀아주더니 아이가 나르시시스트가 될까 봐 걱정스럽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왜곡된 자기 인식으로 이기적으로 자기중심적 행동을 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종의 자기애성 인격 장애이다.


자존감을 키워줘야 한다는 육아 트렌드가 오히려 아이들에게 잘못된 자기애를 형성서 나르시시스트라는 인격 장애를 만드는 위험 인자가 될 수 있다는 정신과 의사 강연을 보고 나서 신랑은 나르시시스트의 특징 중에 작은 아이와 오버랩되는 부분을 찾았던 모양이다. 나르시시즘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크게 의존하게 되는데, 감탄과 칭찬을 받으면 매우 기분이 좋아지지만 반대로 비판을 들으면 즉시 무너지면서 분노로 번지고 공격적으로 변한다고 한다.


둘째 아이는 늘 칭찬을 받고 싶어 하고, 자기 앞에서 언니나 다른 친구가 칭찬받는 것을 들으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화를 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아이에게 바르게 설명해주곤 하지만, 아이가 스스로 그 균형을 찾아가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놀라운 것은 나르시시스트들은 자기애가 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고 열등감을 느끼기에 왜곡된 자아를 부풀려 과한 애정을 쏟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진정 자신을 깊이 사랑한다면 오히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진정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나르시시트가 될까 봐 염려하는 신랑에게 오버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기도 했지만, 아이는 분명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아이임엔 분명하다.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 아닌, 옳은 방향으로 자기를 인정하고, 진정으로 타인도 사랑할 줄 아는 아이로 커갔으면 좋겠다. 누가 뭐래도 난 이 아이의 당당한 자기표현이 참 좋다. 그 당찬 매력을 누가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을 솔직히 인정할 수 있다면, 그다음 단계로도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mathildelangevin, 출처 Unsplash

나치 시절에 실제로 수용소에 갇혀 모진 고통을 당했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그곳의 실상을 덤덤하지만 적나라하게 담았다. 아이의 고백을 들은 후, 문득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수용소에서 갇혀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레 해방을 맞아 자유를 되찾았지만, 평범한 일상을 되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다시 인간이 될 때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



그래, 한 걸음씩만 앞으로 나아가기.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조금 더 사랑하고 서로를 위로해 주는 세상을 향해, 대단한 효녀는 못될 것 같다고 고백하지만, 서로의 짐을 함께 들어주는, 한달음에 목표에 도달할 수 없더라도 조금씩 인내하며 나아가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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