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쁜 아이들>
잠들기 전, 침대에 혼자 쉬고 있는 내 곁으로 큰딸이 다가와 앉았다. 그날 저녁부터 아이 얼굴이 내내 어두웠다. 동생의 장난에도, 아빠의 농담에도 평소와 다르게 시무룩하게 반응하며 제 방에서 혼자 숙제를 하겠다고 내내 두문불출했던 녀석이 웬일인지 먼저 내 곁으로 파고들었다.
아이는 제 입으로 먼저 자신이 사춘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계속 슬프고 눈물이 자꾸 나요. 왜 하루하루를 이렇게 사는 건지 그 의미를 모르겠어요.”
아이는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해지면서 절박한 말투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놨다. 아이의 말에 순간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지 떠오르지 않고 머리가 텅, 빈 것처럼 투명해졌다.
슬픔, 눈물, 그리고 의미라니. 열두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도 무겁고 엄중한 단어들이 아닌가. 마흔이 다된 나도 여전히 품고 있는 감정과 질문들을 아이의 말로 마주하니 막상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나는 그동안 그 답을 찾았고, 그 나름의 하루의 몫을 살아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얼마 전에 본 영화가 떠올랐다. 마침 그 영화에 대해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어떻게 나눠야 할까 생각하던 차에 아이의 질문에 대한 답을 그 영화로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영화의 제목은 <나쁜 아이들>이다.
영화의 배경은 프랑스, 인물 간의 대화도 프랑스어로 이루어진다. 영화는 현재상황과 과거의 한 어린 소년의 시점이 교차되면서 보여진다.
현재, 한 청년과 노인이 된 여자는 마트에서 장을 잔뜩 보고 나오는 손님을 상대로 사기를 치며 생활을 연명한다. 사지 멀쩡해 보이는 청년과 우아함까지 갖춘 노인이 왜 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지 의아함을 던져주며 영화는 그 문을 연다.
하루는 장을 한가득 카트에 싣고 오는 한 노인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다가 애석하게도 그 노인이 여인을 알아보게 된다. 과거 여인의 행적을 알고 있던 노인은 여인의 현재 삶에 놀라면서도 당장 자신이 처한 급박한 처지를 여인에게 호소한다. 그 노인은 최근에 복지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학교에서 퇴학 직전까지 간 불량 청소년들을 모아 재교육을 시켜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는, 일종의 교육 사업이었던 것. 그 청소년들을 맡아줄 선생님을 고용해야 하는데 쉽지 않아서 지금 난처한 상황에 있다는 사연이었다. 그 노인의 말을 듣고 여인은 자신과 함께 사는 청년을 추천한다. 그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아이라고 적극 추천을 하면서 말이다. 도통 여인과 청년의 관계를 알 수 없는 데다 좀도둑이나 하고 있는 청년을 생각하면 노인은 선뜻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막상 다른 대안도 없어서 결국 하루만 그 청년을 채용하기로 한다. 그렇게 그 청년(와엘)이 불량 청소년들을 맡아 단 하루만 봐주기로 한 것.
학교에 가는 것을 거부하는 아이들이 모인 곳이니 분위기는 어떨지 뻔하다. 왜 학교에 가야 하는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 의미를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찾아온 이상한 한 남자. 아이들은 이곳에 오지 않으면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경고에 마지못해 온 곳에서 와엘을 만난 것이다. 와엘은 아이들에게 살면서 진짜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준다. 어떤 어른을 조심해야 하는지, 진짜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그리고 살면서 만나는 이들과 진정한 관계는 어떻게 맺을 수 있는지 같은 것 말이다. 와엘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쳐준 이는 다름 아닌 함께 사는 그 여인이었다.
와엘은 과거에 전쟁이 일어나 가족들이 모두 죽고 홀로 살아남았다. 겨우 일곱 살이나 될까 한 나이에 와엘은 혼자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지독한 외로움과 무서움에 시달렸던 와엘은 수녀들이 돌보아주는 보육원으로 가게 됐고, 그곳에서 수녀였던 젊은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동안 그 누구도 믿지 못했던 와엘은 그곳에서 드디어 또래 친구를 만났고, 그 친구와 재미있는 일상이 이어질 것으로 여겼는데 또 불행이 닥친다. 도무지 자신에게 일어나는 비극들의 전모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만 살아남아 버텨야 하는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와엘에게 그 여인은 말한다.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살아가는 이유이자 의미가 된 것이다. 와엘과 노인은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지 못해 좀도둑으로 살아가야 했던 형편에도 둘 사이는 언제나 웃음과 기쁨이 넘쳤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지켜줬던 로자 아줌마와의 관계가 떠오르기도 한다.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해 방황하던 모모도 결국 아줌마를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생을 버텨야 하는 이유를 찾았던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는 거창하고 대단한 것에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가는 거창한 의미를 묻는 순간에도 우리는 주어진 하루를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바꿀 수 있는 것은 고작 오늘 하루뿐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곁에 있는 한 명을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것뿐이다.
생에 떠밀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아서, 그렇게 떠밀려 흘러가는 내 삶이 슬퍼서 때론 눈물도 나고 허무할 수도 있지만 잠시 그 흐름이 아닌 내 존재에 집중하면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달리 볼 수 있다. 내 주변에 나 혼자만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사실 그 생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오늘 하루를 사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영화로 돌아와서, 아무런 의미도 기쁨도 깨닫지 못했던 아이들의 삶에 와엘이 들어서면서 각자의 삶이 조금씩 다르게 전환된다. 그저 비극이고 허무였던 각자의 일상이 한 사람의 사랑과 희생으로 다르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목도한 아이들은 자신들 스스로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그렇게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의미를 찾아 또 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그 하루 동안 각자가 해야 할 몫의 일을 하면서, 사랑할 이들을 마주하여 존재의 위대함을 발견하면서.
삶의 의미를 모르겠어서 슬프다는 딸에게 거창한 답을 덥석 던져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이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하루의 몫을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아이다. 그동안 읽었던 책과 성경, 그리고 나눔을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 수도 없이 말하곤 했다. 아이가 그 답을 몰라서 슬픔을 느끼고 눈물이 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머릿속에만 각인되어있던 교훈이 심장으로 흘러가는 것이니 말이다. 아이가 진짜 성장하는 중임을 믿는다. 그저 나는 아이의 하루에 와엘과 같은 참 어른의 역할을 해줄 수 있길 소망해본다.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 있는 하루가 되길, 그 하루를 함께해주는 엄마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