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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 모델이 된 아이

by 세리



두 딸이 새로운 학교에서 새 학기를 맞은 지 딱 일주일이 지났다. 근래 읽은 육아서에서는 ‘놓아주는’ 육아를 하라고 조언을 했지만 난 그 ‘놓아줌’의 경계가 어디인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한 채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 동안 내내 마음이 쓰였다. 놓아주는 연습인 양 아침마다 아이들이 등교할 때 함께 나가 동네천을 숨이차게 내달렸고, 돌아와서는 독서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지만 가장 공을 들인 건 하교 후 아이들에게 줄 간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둘째 날부터 학교 앞으로 부러 데리러 나가진 않았다. 다만 돌아왔을 때 내 적은 품으로만 맞아주기는 부족할 듯해서 집안 가득 달콤한 향을 풍겼으면 했다. 서툰 실력이지만 쉽게 할 수 있는 베이킹 방법으로 이런저런 쿠키와 파이를 만들어 구웠다. 새하얀 식탁 위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접시에 예쁘게 플레이팅을 하며 이 엄마의 마음을 그러모아 투영시켰다.


아이들이 오기전 직접 구운 쿠키와 파이들



큰아이보다 1시간 일찍 하교하는 둘째가 도어록을 여는 소리가 들리면 잽싸게 현관 앞으로 튀어 나가 두 팔을 활짝 연 채 대기했다. 아이는 특유의 콧소리를 입안에 잔뜩 불어넣은 채, 문을 열면서 동시에 “엄마아~~~”하고 부르며 내 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직 찬 기운을 온몸으로 맞은 아이의 몸에서 낯선 향이 맡아졌지만 아이의 얼굴은 이미 새봄이 내려앉은 듯했다. 반 분위기는 어땠는지, 새로운 선생님은 어떤 분인지, 수업 시간에는 무얼 배웠는지, 반 친구들은 아이에게 친절했는지, 수업 시간에 손을 들어 발표할 용기를 냈는지. 입 밖으로 뿜어내고 싶은 물음들이 한가득하였지만 모든 것을 꿀컥 삼키고 아이를 좀 더 안아줬다.


“수고했어.”라는 한 마디면 족했다.


아이는 손을 씻고 집 안 가득 찬 단내의 출처를 찾아 서둘러 식탁으로 갔다. 세팅된 간식을 보고 다시 한번 돌고래 소리를 내주면서 의자에 앉아 열심히 간식을 먹었다.


“여기는 3교시 끝나고 밥을 먹어서 오면서 진짜 배고팠는데. 엄마 최고!!” 역시나 아이에게 먼저 채워줄 것은 배고픔의 허기가 맞는 것이다. 그렇게 허기를 달랜 아이는 엄마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잔뜩 채워져 곧 터질듯한 이야기보따리에서 한 움큼씩 귀한 것들을 꺼내 풀어냈다.


“엄마, 우리 선생님 진짜 이뻐! 키도 크고 엄청 이쁘다니깐! 진짜야!” 첫날 아이들을 인계해 준 담임 선생님을 살짝 본 기억을 떠올려봤을 때 아이의 묘사가 과장됐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지만, 아이의 말에 고분고분 화답했다. 아이는 계속해서 자신의 선생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수업 때 했던 재미있는 게임들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 아직 친구는 사귀지 못한 눈치였다.


그다음 날, 역시나 근사한 간식을 세팅한 채 초조한 마음으로 아이를 기다렸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품 안으로 파고든 둘째는 가방도 채 내려놓지 못하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단숨에 뱉어냈다.


“엄마! 나 우리 반 모델이다!”




둘째 아이와 모델은 참 잘 어울렸다. 아이의 설명을 채 듣기도 전에 교실을 런웨이 삼아 당당하게 활보하는 아이를 상상하고 말았다. 아이는 학교에 가는 일주일의 5일 동안 어떤 머리를 할지 계획을 세웠고, 아침마다 난 아이의 요구에 따라 최선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월요일은 고데기로 말아서 풀어 머리띠만 하기, 화요일은 하나로 묶어서 땋기, 수요일은 위로 바짝 올려 묶은 양 갈래로 삐삐머리, 목요일은 낮게 하나로 묶되 살짝 옆으로, 금요일은 반만 묶어 돌돌 감기. 어느 유전자에서 뻗어 간 것인지 길쭉한 팔다리에 조막만 한 머리를 지닌 아이의 비율을 볼 때마다 참 근사하게 빚어진 몸이라고 감탄을 하는 고슴도치 어미였다. 그 아이가 모델이 됐다는 것에 수만 가지 즐거운 상상을 해봤다. 아이가 말한 학급 모델은 나의 상상과는 전혀 달랐지만.


친구를 그려야 하는 수업이었던 모양이다. 앞에 나와서 포즈를 취해줄 친구 하나가 필요했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모델이 돼 줄 지원자를 요청했을 때 아이는 용기 있게 손을 든 것이다. 자신 말고도 몇몇 아이가 자원했고, 그 아이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아이가 이겨서 당당히 모델 자리를 쟁취했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말이었다.


내가 상상한 그 모델은 아니었지만, 투명하게 빛내며 말하는 아이는 눈이 부셨다. 새로운 곳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모델로 나선 그 용기를 마음 모아 칭찬했다. 아이는 자신하고는 영 딴판으로 아이들이 그림을 그렸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고 기세 등등하게 부연 설명을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고 몇몇 친구들이 말을 걸었고, 한 친구는 “우리 친구 하자!”라고 당차게 말해줘서 아이는 그 친구와 베스트 프렌드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온다고 말했다. 아이에게 멋진 하루가 분명했다.


두 아이는 근사한 일주일을 보낸 것 같다. 현관문을 열고 달콤한 향이 그득한 집 안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늘 미소가 가득했고, 내 품으로 파고드는 아이들의 체취는 시간이 지날수록 안도의 향으로 바뀌어갔다. 고작 일주일만 보냈을 뿐이지만, 아이들이 하루씩 감당해낸 무게들을 생각하면 결코 허투루 취급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아침마다 긴장감에 기대 한 스푼씩 보태서 서로의 하루를 응원했고, 그 응원은 맹렬한 용기로 가득한 각자만의 이야기들로 꽉 채워 돌아오곤 했다.


내 손을 놓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런웨이로 걸어 나가는 두 아이를 나는 그저 뒤에서 응원할 뿐. 보이지 않아도 어디선가 두 손 맞잡고 힘차게 함성을 보내고 있을 엄마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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