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자의 당당함'으로 맞서기
시골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전학 온 한 친구의 매력에 모든 친구가 사로잡혔다. 또래보다 성숙해 보였던 미선(가명)이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하는 말에 모든 친구를 집중하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라 하루가 멀다고 붙어 지내던 친구들은 어느새 나보다 미선이 주위에 몰려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자존심이었는지, 괜한 치기였는지 미선이를 추종하며 들러붙어 과하게 호응해주는 친구들이 꼴사나웠는지 나는 그 무리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선이의 모습을 자주 흘끔거렸다. 그 애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주의깊게 듣고 나는 왜 저 말을 진작에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을 하기도 했다. 미선이의 머리 모양, 미선이의 옷차림, 그리고 친구들에게 하는 제스처까지도 유심히 관찰하고 그와 비슷하게 해 보려고 홀로 분투했다.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미선이를 추종하고 따르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늘 도도하게 그의 말에 차갑게 반응했던 내가 미선이 눈에도 영 거슬렸을 것이다. 친구들을 휘어잡는 묘한 매력에 표적까지 생겼을 때는 그 마력이 어마하게 증가하는 것을 그때 알았다. 미선이는 다른 여자 친구들을 모두 거느리며 나를 소외시키려는 자기 뜻을 교묘하게 관철했다. 현재 용어로는 '가스 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난 미선이의 그 영악한 말과 행동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내 주변에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크게 힘들고 서글펐지만, 그 어린 마음에도 대체 미선이는 갖고 있고 나는 갖지 못한 그것이 무엇인지 간절히 알고 싶었다. 결국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것을 갖지 못한 나를 향한 자기 비하와 열패감에 점점 휩싸이게 됐다.
다행스레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로 전학을 가면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화 속 파스텔 색상으로 아스라이 물들어 있는 추억으로만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고향의 한 페이지다. 그렇게 전학을 가고 새로운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지만은 않았다.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었다. 정확히는 새로운 곳에서 미선이처럼 친구들을 사로잡는 아이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왠지 이전의 나를 모르는 곳에서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미선이의 말투, 표정, 행동, 그리고 친구들을 대하던 그 카리스마를 그대로 따라 한다면 나도 친구들에게 인기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내가 미선이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은 전학 간 첫날에 바로 깨달았다. 그 학교에도 미선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시골에 있던 미선이처럼 친구들을 몰고 다니는, 인기 있는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이후로 보냈던 긴 학창 시절 동안 내가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은 내가 어느 곳에 가든 미선이는 존재하고, 나는 미선이 같은 존재가 되기는 어렵다는 처절한 사실이었다.
물론 전한 간 이후로는 시골에서처럼 심한 왕따를 당한 적은 없다. 완벽한 미선이는 될 수 없었지만, 친구들과 사귀는 요령을 터득하고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면서 적절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처세술을 자연스레 배웠던 것 같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친구 관계에도 인기보다는 진짜 마음을 교류하는 친구를 찾게 되면서 점차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서 벗어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 어떤 집단이든 특별하게 무엇을 하지 않음에도 사람을 끄는 매력을 소유한 이들이 존재한다. 보통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척 하지만, 과거의 나처럼 많은 이들 내면에는 '나도 매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라는 욕망이 존재하기에 그런 매력을 갖출 수 있는 비법서라고 소개하는 자기 계발서들이 꾸준한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닐까. 강한 의구심이 들지만 그러한 욕망을 잠재우지 못해서 그런 책을 사서 결국 또 속았네 하는 괘씸함을 몇 번이고 느껴본 적도 있을 것이다.
사람을 끄는 매력, 결혼하고 나만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난 후에는 그러한 욕망에 비교적 덜 시달리지만,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속한 단체나 모임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 며칠, 이 '사람을 끄는 매력'에 다시 고민했던 것은 큰아이 때문이다. 내가 딱 미선이를 만나서 인생의 큰 위기감을 처음으로 맞닥뜨렸던 나이, 12살. 공교롭게도 12살인 큰아이가 나와 같은 고민에 힘들어하고 있다.
주변 친구들이나 인기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에 열심히 하는 것 같이 보이는 아이도 친구 문제가 제일 힘든 고민이다. 자기에게 먼저 다가와서 놀고 싶어 하는 친구가 없다는 것이 고민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같이 놀고 있는 친구들이 있지만 자기를 베스트로 여기고 좋아해 주는 친구도 없는 것 같아서 속상하다고 했다. 누구보다 학급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여러모로 인정도 받지만 그것과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별개라는 것도 알았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인기 있고 같이 놀고 싶어 하는 친구들을 유심히 관찰해보니 그 친구들에게 비하면 자신은 재미도 없고 성격도 안 좋은 못난이 같다고까지 말하는 것이 아닌가. 친구 하나로 자존감이 이렇게 추락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엄마로서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했던 대로 아이도 인기 있는 친구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내가 그 아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결과로 알고 있는 엄마가 얘기해준들 그 상황에 놓여있는 딸이 알아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아이 스스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실패와 아픔을 겪으면서 알아갈 테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내 마음도 참으로 아프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일생일대의 가장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 싶다.
이승우 작가님이 작품에 표현했던 '서자의 당당함'이란 말을 내 삶의 기치로 내세우곤 한다. 적통 계열로 태어난 적자가 아닌 태어나면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서자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적자의 호의에 의지하여 주류에 편승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서자들은 더욱 지치고 낙망하게 된다. 세상은 적자들의 힘과 능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권력을 갖고 돈이 있는 사람, 사람을 끄는 강력한 매력을 갖춘 사람이 세상을 호령하며 그들 뜻대로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무력해진다.
그 세상이 고스란히 12살 세계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적자로 태어나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시각을 바꿔보는 것이 어떨까. 사람을 끄는 매력을 갖고 태어난 적자는 아닌, 서자로 태어난 숙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서자로 당당하게 살아보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피해의식에 절어 적자의 호의에 기대하지 않고, 주류의 흐름을 좇아가려고 가랑이 찢어지게 애쓰지 않고 내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내 모습을 인정하며 살아보는 것. 그것이 바로 '서자의 당당함'이다.
나의 생체리듬에 맞지 않는 삶을 요구하는 세상을 향해 '아니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서자의 당당함,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아이와 함께 그렇게 살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