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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손에 절대거울 쥐여주기

by 세리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아이의 몸이 점차 불어나기 시작했다.


본디 마른 체형이 아니고 조금만 먹어도 살이 금방 붙는 체질의 아이다. 밖에서 몸을 움직여 활동하는 것보다 앉아서 책을 보거나 꼼지락거리는 시간이 더 많고,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먹는 거로 푸는 방식이 초래한 결과였다. 언젠가 친구들과 먹어본 마라탕의 매력에 빠져서 먹고 싶은 것을 말해보라고 하면 1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마라탕이라고 한다. 커가면서 살이 찌는 음식들 위주로 좋아하는 메뉴가 바뀐 것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살이 찌면 외적으로 보이는 안타까움보다 실제로 불편한 것들이 꽤 발생한다. 일단 살이 불었지만 키는 비례해서 크지 않았으니 옷 사이즈가 애매해진다. 키에 맞추자니 허리가 안 맞고 허리에 맞추자니 모양새가 영 볼품없다. 온화한 성질의 아이는 특별한 사춘기 증상이 없는 듯했지만 두드러지게 바뀐 것은 외모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다. 이전에도 예쁘고 마른 친구들을 보면 부럽다고 말한 적은 있으나 최근에는 그 마음이 부쩍 더 커진 듯했다. 자신은 자꾸 살이 찌고 얼굴은 못생긴 것 같은데 반 친구들은 날씬하고 예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외모에 관심을 두고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이전에는 그저 엄마가 골라준 옷을 입었던 아이가 슬슬 옷 투정을 하기 시작했다. 미운 4살에도 하지 않던 옷 투정을 13살 아이가 하고 있으니 반가워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으나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예쁜 옷을 입혀주고 싶은 것은 모든 엄마의 마음이겠지만 아이가 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것은 옷의 문제라기보다는 아이 체형과 관련된 불만이라는 것을 알기에 볼멘소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핏을 원하면 은서가 살을 빼야 가능할 것 같은데….” 기어이 이런 말을 내뱉는 일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누구보다 거울에 비춘 자기 몸을 보면서 마른 친구들과 같은 핏이 나오지 않는 것은 자기 몸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거기에 팩폭을 해버린 꼴이었다.


자기 몸에 불만이 생겼으면 스스로 관리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절로 생겼지만 아이는 그저 아이일 뿐이었다. 좋아하는 간식과 마라탕을 끊을 만큼 결연한 의지를 갖지도 못했고, 음식 앞에서는 아직 자기 몸과 연결 지어 생각하기란 어려운 아이. 마라탕을 먹고 싶다는 아이에게 기어이 또 한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라탕만 끊어도 살이 빠질 텐데…“ 결국 마라탕은 한 달에 한 번만 먹는 걸로 서로 약속을 했지만(살찌는 것을 떠나서 아이에게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났다), 아이의 먹는 것에 일일이 잔소리를 하며 참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외모를 비교하며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로 느껴지는 순간은 어른들도 종종 느끼는 것 아니겠는가. 비교란 뇌과학적으로 자아를 인식하게 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이 우월한 것을 인식하며 자아를 찾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으려나. 아이는 본격적으로 그 시작점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당당하고 묵직하게 자신감을 갖추고 있던 아이가 외모로 인해 점점 쪼그라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아이가 외모로 인해 위축되고 자신이 못났다고 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아니야, 은서 네가 얼마나 예쁜데! 너는 그냥 네 존재로 충분히 아름다운 거야…”라고 말해주곤 했다. 처음에는 내 말에 용기를 얻고 환하게 웃으면서 “네!”라고 대답했었지만, 그것도 반복이 되니깐 나중에는 “뭐, 저도 알죠…”라며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듯, 기계적인 대답만 할 뿐이었다.



십 대를 지나고 있는 아이에게 책에서 보고 연습한 대로 되뇌는 걸로는 아이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이제는 누구보다 아이가 느낀다. 엄마의 진심이 무엇인지, 엄마가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네가 무엇을 하든 엄마는 응원할게”라고 말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거나 학교에서 받아오는 성적에 발끈하는 것을 보여줄 때, 아이들은 그 찰나가 엄마의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잠시 잠깐 스치는 아이들을 속일 수는 있으나 일상을 함께하는 내 아이들은 절대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아이의 모습 그대로가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말하고 싶다면 진짜로 아이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야 한다. 그런데 엄마인 나도 사실은 아이가 더 예쁘고 날씬했으면 좋겠는는 마음이 컸다. 내 아이를 보는 기준마저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하여 판단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입시만이 교육의 목적이라 생각하는 주류의 흐름에 따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두 아이가 올해부터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다. 아이들과 충분히 대화하고 결정했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그저 엄마 아빠를 믿고 결정한 것이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나와 아이들의 기준과 생각까지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곳에 들어와서 더욱 느낀다.


여전히 나는 경계에 서서 양쪽을 기웃거리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기웃거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아이는 영민하게 포착한다. 엄마가 흔들리면 아이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외모에 대한 것도 그 흔들리는 것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공부, 친구 문제, 진로, 시간 관리 등 그 모든 것에 제대로 된 기준이 서지 않으면 아무리 대안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아이의 손에 절대 거울을 쥐여주고 싶다. 어떻게 비교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거울로 자신을 봤을 때는 스스로를 긍정하며 아름답게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를 비교하는 기준이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워갔으면 한다. 내가 나인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런 거울. 나를 긍정하기에 타인도 긍정하며 함께할 수 있는 넉넉한 용기를 먼저 낼 수 있게 하는 그런 거울.


그런 것을 당장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거울은 돈과 마음만으로는 결코 살 수 없다. 절대 거울을 갖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아이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주어서 켜켜이 그것들이 견고한 층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전히 예쁘고 날씬한 친구들, 똑똑하고 근사한 친구들, 두드러지는 재능을 가진 친구들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절망하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엄마는 네가 정말 소중해. 네가 가진 재능이 얼마나 멋진 줄 알아?! 너를 통해 이뤄질 일들을 기대해. 너는 그저 너로 멋지게 살면 되는 거야”라고 계속해서 말해주고 믿는다면 언젠가는 아이의 손에 그 거울이 들려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다.


그 거울은 결국 엄마 손에 있는 것을 아이에게 줘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절대 거울을 갖고 있지 않은 채 실체를 모르는 허상을 묘사하듯 아이에게 되뇐다면 아이는 그것을 갖고 싶기는커녕, 유치한 판타지로만 치부하고 살아갈 것이기에 말이다.


나부터 갖자. 그 절대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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