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사람으로 살기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는 책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작가, 샐린저의 삶을 다룬 평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가 작가의 꿈을 꾸고 글을 쓰기 시작해서 고전의 반열에까지 오른, <호밀밭의 파수꾼>을 쓰기까지 샐린저가 겪은 일과 그 이후의 삶까지도 다루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과 작가가 된다는 것에는 큰 틈이 존재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는 것과 작가로서 성공하고 돈을 벌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전문 작가가 된다는 것도 크게 다를 것이다. 최근에 관심을 두고, 구독하며 홀로 덕질을 했던 브런치 작가분이 있었다. 그분은 매일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올렸고, 책도 출간한 작가셨다. 브런치 구독자도 많았고, 나름 두터운 팬층이 있는 분이었는데 최근에 브런치에 매일 올리던 글을 중단한다고 선언하셨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동안 매일 글을 써내는 게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었다.
그분은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이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더 돌아오는 보상이 적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책까지 출간했지만,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아니라면 큰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고, 특히나 광고가 달리지 않는 브런치에 매일 글을 올리는 것은 라이킷 수나 구독자 수로 자신의 글을 독자들이 좋아하는지 판단하는 척도가 될 뿐인데 갈수록 반응이 줄어서 지쳤다고 했다. 난 그 정도로 글을 많이 쓰지 않았지만, 그분의 고백이 십분 공감됐다.
블로그로 시작해서 브런치로 글 쓰는 플랫폼을 옮겨오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인가 더욱 진지하게 고민했다. 처음에는 아이들과 일상의 기록을 남기고 싶었고, 이후에는 소박하지만, 나만이 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러면서 브런치를 쓰는 많은 작가분이 자신의 '책'을 출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을 알았고, 나도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꿈을 꿔보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매일 글을 쓰면서 내가 그토록 갈구했던 것이 글쓰기라는 것을 알았고,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게 벅찬 감동을 주는 것임을 느꼈다. 완벽한 고독 속에서 나만의 내면세계로 침잠해서 내 안의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일. 미처 돌보지 못한 내 감정과 상처, 기억들을 글로 표현하는 행위만으로 크나큰 위로와 치유를 얻었다.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내 실력을 처절히 깨닫고, 잘 쓰는 작가님들의 글을 보면서 자괴감이 몰려왔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글 쓰는 것에 열심을 내는 것일까?'라는 상념이 수시로 현실 감각을 일깨우기도 한다.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에서 샐린저는 글쓰기 수업을 들었던 휘튼 교수에게 일생일대의 질문을 받게 된다.
평생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계속 글을 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지금 당장 문을 나가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한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샐린저는 그 답을 전쟁터에서 찾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전방에 배치된 샐린저는 참혹한 전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매일 오가는 상황에도 그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을 절대 놓지 않는다. 몽당연필로 쪽지에 조각조각 글을 쓰기도 하고, 연필을 들 수 없는 전쟁 상황에서는 총을 들고 입으로 글을 쓴다. 그는 글 쓰는 것을 멈출 수 없었고, 글을 쓰는 행위는 결국 그를 전쟁터에서 살아남게 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후, 그는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밤낮으로 환영에 시달렸고, 오히려 제대한 후에는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샐런저는 명상을 통해 전쟁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냈고, 결국 글 쓰는 삶으로 회귀한다. 마침내 그는 콜필드의 이야기, <호밀밭의 파수꾼>을 완성한다. 몇몇 출판사들은 작품이 난해하고 주인공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악평을 하며 출판을 거절하지만, 결국 이 작품은 미국 사회를 뒤흔든 시대의 역작으로 평가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리고 결국 그는 대학 시절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휘트 교수에게 답할 수 있게 된다.
평생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전 계속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미 그에게 글쓰기는 종교 이상의 것이었다. 천재 작가의 삶이 모두 샐린저와 같지는 않겠지만, 무엇이든 하나에 극도로 몰입한다는 것은 그 밖의 다른 것에는 좀처럼 관심을 둘 수 없다는 것으로도 설명된다. 그는 작가로서는 성공했지만, 그 외의 다른 역할은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나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에게 글쓰기는 끝낼 수 없는 중독이었다. 끝내 세상과의 고립을 선택한 그로 인해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힘든 시간을 보낸다. 샐린저의 결말을 어쩌면 비극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좋아하고 몰두하는 일을 찾아 완전한 고립을 택한 샐린저의 삶이 내게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만일 나에게도 샐린저에게 주어진 질문을 받는다면 난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에서 저자는 ‘책’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꿈꾼다고 했다. 책이 의사소통의 핵심이 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책을 써야 하고, 그걸 읽어야 한다. 읽은 책에 관한 공감이나 반박을 위한 책을 이어서 또 쓰고, 다시 소통하는 그런 사회. 상상만으로 멋지다. 어쩌면 아주 불가능한 사회는 아닐 수 있다. SNS에 글을 쓰며 나와 같이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이들과 소통하면서 그런 세상을 만드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환희를 종종 느꼈다.
쓰는 사람들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쓰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분명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 여정에 눈에 보이는 보상이 없을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꾸준히 글을 쓰고, 공모전에 도전해 좋은 결과도 얻었지만, 누군가 보기에는 그것이 일상의 큰 변화를 불러오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좋아하는 것을 매일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리라.
써야 하는 사람은 써야 한다. 당신이 하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작품을 몇 편 발표하기 전에는 당신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욕망을 마주하고 풀어내면 분명히 통쾌할 거다. 가끔은 고생스럽기도 하겠지만 그 고생에는 의미가 있다. 책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을 포기하자. 의미를, 실존을, 흔들리지 않은 삶의 중심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다.
장강명, <책 한번 써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