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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Oct 16. 2023

비교를 넘어 창조하는 삶으로

생산자로 살기

아이를 키울 때 엄마의 자유는 제한된다. 어린아이의 성장 속도에 맞춰 나의 속도를 맞춰야 한다. 나는 하루 세 끼를 다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고, 매일 청소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아이를 키울 때는 나의 취향과 상태는 고려되지 않는다. 날마다 자라야 하는 아이에게 삼시 세끼를 먹이기 위해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든다. 아이의 면역력이 줄지 않도록 매일 환기하고 청소를 한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학창 시절의 오래달리기처럼 지루한 일상이 이어진다.


아이가 조금 커서 어린이집에 갔을 때부터는 숨통이 트여 자유의 빛이 한 줄기 들어오는 것 같았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 가족은 어디에서 살아가야 할지 고민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잠시동안 아이의 부재는 분명 그 모든 것에서 찰나의 해방감을 안겨주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이의 성장 속도에 가속이 붙으면 엄마의 욕망은 그보다 몇 배 더 열띤 속도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때론 나 자신보다 더욱 나로 여겨지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잠잠히 그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비교에서 이기고 싶은 엄마로서 욕망이었다.



남보다 더 갖고 싶은 마음보단 남만큼은 갖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것은 교묘하게 우리의 욕심을 정당화시킨다. “내가 뭐 큰 것을 바라나요, 그저 남만큼만 살고 싶다는 거죠.”라는 말. 과연 남만큼만은 어느 정도일까.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만났던 많은 엄마들에게 “우리 아이가 남보다 뛰어나길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보통은 됐으면 하는 거지…”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물론 나의 마음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보통’은 과연 어느 지점이었는지를 생각한다.




성경에는 악마가 예수를 시험하는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물질에 대한 시험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유혹은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떨어져 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적’을 만들고 싶은 욕망의 실현을 뜻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을 기적을 행할 수 있음을 악마는 알고 있었다. 악마가 시험하는 것은 자기 말에 굴복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자신의 욕망에 굴복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타인에게 ‘나는 이 정도는 가능한 사람이야’라고 보이고 싶은,  비교 우위의 욕망을 실현하길 말이다.


우리가 매일 받는 시험도 이와 같다.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 우리에게 한도 없이 도사리고 있다.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사는 것은 응원하고 싶은 멋진 일이다. 다만 그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 ‘다른 사람이 가진 것’과 비교하며 이 정도는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아픈 현실이다. 그것은 엄마로서 아이들을 교육할 때 더 수면 위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우리 아이가 세상이 설정해 놓은 기준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되면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다.


엄마이지만 아이와 분리하여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엄마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전업주부로만 살 때도 있었고, 일을 하며 워킹맘으로 살아본 적도 있다.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엄마의 정체성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현실을 분명히 체감했다.



비교에서 벗어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아이를 두고 비교하는 것도, 비교를 당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생각해 엄마들 모임에 아예 참여를 안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깊은 곳에는 늘 아이로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욕구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 욕망을 무시하기보다는 그것을 마주하며 넘어서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오답 노트를 작성하듯, 내가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무엇인지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우리는 남과의 비교에서 앞서고 싶은 욕망을 소비하는 것으로 해결할 때가 많다. 예쁜 옷과 명품 가방을 사고, 수입에 비해 넘치는 외제차를 타고, 남보다 더 좋은 지역에서 비싼 아파트에 살고. 나를 돋보이게 하는 그 무언가를 계속해서 소유하고 싶어 하는 소비욕은 한없이 샘솟는다.



욕망의 고리를 끊어내는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소유와 소비의 욕망을  완전히 끊어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더라도 그것에서 초점을 옮기는 방법은 있다. 바로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다. 더 이상 소비자로만 살지 않고 생산자로 살겠다고 자리를 변혁하는 것이다. 본디 사람에게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능력에 창조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글을 쓰면서 알았다. 내 안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창조의 샘이 존재한다는 것을.


창조력을 발휘한다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도 아이들의 놀이터처럼 '10분만 더'를 외치며 더 놀고 싶은 곳이 된다.  어제와 다른 새로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것, 악기를 연주하는 것, 영상을 만드는 것, 운동에 도전하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종교를 갖는 것, 이웃을 돕는 것 등. 해보지 않은 새로운 영역을 도전하는 것은 우리의 창조성을 발휘하는 일이 될 것이다.



글쓰기는 누구나 손쉽게 새로운 하루를 창조할 수 있는 매직을 선사한다. 글쓰기가 창조의 작업이 되는 것은 오직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인생사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산다고 말하지만 각자의 삶으로 들어가 보면 똑같은 얼굴이 없듯이 저마다의 무늬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각자가 쓴 글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만의 글이다. 비록 조악하고 볼품없어 내놓기 부끄러운 문장들이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만들어 낸, 나만의 창작품이 된다.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롯이 창조할 수 있는 일이 이만큼 쉬운 것이 어디에 또 있을까.


글쓰기의 행위는 나의 오늘을 새롭게 창조하는 거룩한 임무가 된다.


 글을 쓰는 것은 시간이 우리 속에 새겨 놓은 무늬를 글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장르에 관계없이 글 쓰는 모든 행위는 망각에 대한 저항이다. 소멸이 예정된 무늬를 굳이 되살리는 게 허영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허영조차 없었다면 문명도 없었을 것이다. 지도조차 없이 걸어가야 하는 인생길에서 가끔 누군가의 글이 길잡이 구실을 해줄 때도 있다. 시간이 새겨 놓은 무늬는 개인에게 속한 것이지만, 시간의 무늬를 기록하는 일은 공적인 직무에 속한다. 그 무늬는 시대의 총체성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기석, <일상의 순례자> P.10



모든 엄마가 비교를 넘어 날마다 창조하는 삶으로 살아가기를 꿈꿔본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길잡이가 되주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나의 무늬를 기록한다.




*창조: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듦'이란 의미로 사용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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