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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Feb 19. 2024

남동생 결혼식

월요일은 기적이다.

다섯 살 터울의 동생이 결혼했다.


둘째가 언니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자랐던 막내는 나를 누나가 아닌 언니라고 부르곤 했다. 몇 살까지 이어졌는지는 선명히 기억나지 않지만, 꽤 오랫동안 언니라고 부르며 내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곤 했다. 할머니 환갑잔치 때는 자신도 언니들처럼 여자 한복을 입겠다고 온몸으로 떼를 부려 도저히 당해내지 못하고 사촌 동생의 여자 한복을 빌려 입혔던 기억도 난다. 엄마의 오래된 앨범에 보관되어 있는 그때의 사진을 보며 두고두고 동생을 놀려먹기도 했다.


내가 세상에 나오고 3년 후에 태어난 둘째가 딸이라는 것을 알고 애써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멀뚱하게 반응했다는 아빠는 막내가 아들인 것을 알고 어찌나 기뻐했던지. 온 동네가 떠들썩했던 사건이라고 두고두고 회자되곤 했다. 둘째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그건 나에게도 꽤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아들, 아들' 하면서 애지중지 여기던 부모님의 눈빛과 남다른 손길에 서운하고 질투가 났을 법도 한데 그런 감정은 별로 없었다. 유독 귀여운 외모에 어릴 때는 엄마를 찾으며 잘 울었던지라 나의 경쟁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도 큰 것 같다. 서른이 한참 넘어 이미 어른이 된 지 오래인 장성한 청년이 여태 철부지 아가로만 보였던 것도 당연했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동생이 결혼까지 할 거란 생각은 늘 아득하게만 여기고 있었는데 실로 결혼하겠다고 선언해서 놀랐다.


6살이나 어린 어여쁜 신부였다.

처음 우리에게 인사를 왔는데 어릴 때 남동생을 보던 그 마음처럼 그저 귀엽고 예쁘다고 여겨졌다. 나중에 우리 딸들도 저리 곱게 커서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내 마음은 기쁠지 슬플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엄마가 그저 흡족하다며 기뻐하니 그것으로 더 보탤 말은 없었고, 그저 새로운 한 사람이 우리 가족이 되고 싶다고 말해주는 것이 기꺼웠다.


둘은 결혼식에 축사를 내게 부탁하고 싶다 했다. 사돈어른도 계시고, 서로 친구들이 차고 넘친다는 것도 알았는데 굳이 나에게 축사를 해달라고 하기에 처음에는 고사했다. 평소 살갑게 자주 연락하는 남매 사이도 아닌데 또다시 부탁하는 동생의 청을 물릴 수 없어서 결국엔 그러겠노라 했다. 그러곤  바로 축사를 쓰지는 못하고 마음에 돌덩이만 잔뜩이고 진채 부담만 안고 몇 개월을 보냈다. 막상 엄마는 아들 결혼식에 도울 것이 없어 한가롭다고 했는데, 괜스레 축사하겠다고 수긍해서 남모를 무거운 짐을 안고 지낸 것 같다.


몇 번의 수정을 하며 두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축사를 완성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까지 왔던 긴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꽤 긴 시간 동안 함께 겪은 좋은 순간도, 애써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까지도. 그저 철부지로 여겼던 동생이 우리 가족역사의 고비마다 든든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에 새삼 고마웠다. 편지를 쓰며 누구보다 아빠가 생각나고 그리웠다. 하객 모두를 눈물 바람으로 만들 수는 없었기에 아빠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쓰지 못했지만, 우리의 그리움과 보고 싶은 간절함이 드러났으리라.


우리네 평범한 인생에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알아보고,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일만큼 놀라운 기적이 어디 있을까. 그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매일 깨닫는다면 결혼의 긴 여정이 그리 힘들지만은 않으리라. 날마다 작은 기쁨들을 마주하며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자주 표현하고 사랑의 먼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두 사람이 되길. 한참 앞서 걷고 있는 나도 다시금 결혼의 의미를 생각하며 그렇게 오늘을 살겠노라 다짐했다.


축사의 시간은 무사히 끝났고, 인사치레일지라도 모두에게 좋다고 들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젠 나의 자리에서 두 사람을 응원하며 기도해 주는 일만 남았으리라.


동생아, 부디 잘 살거라. 예쁜 아내 울리지 말고 아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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