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은 질문하다.
월요일 아침부터 아이에게 괴성을 질렀다. 아이를 키우면서 대단한 원칙을 세우진 못하지만 적어도 등교하는 아침에는 혼내지 않고 기분 좋게 보내자고 늘 다짐하면서 말이다.
엄마로서 소리를 지를 이유는 충분했다.
둘째는 학교 가기 직전에 숙제로 가져가야 한다며 '크리스마스'와 관련한 동화책을 찾아달라고 난리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몇몇 책을 제외하고 처분하며 지내고 있는지라 뜬금없이 그와 관련된 동화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숙제가 있었다면 금요일 하교 후부터 주말 내내 말할 수 있는 수많은 시간이 있었는데 하필 등교 직전에 말하다니. 당장 찾아내지 않으면 난리가 날 것처럼 생떼를 부리니 화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하필이면 또 아이의 열려있는 가방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저것은 책가방인지, 쓰레기통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저분한 그것이 내 레이더망에 잡힌 것이다. 책 찾기는 어느새 잊어버리고 당장 가방을 가져오라고 했다.
가방을 열어보니 온갖 프린트물들이 구겨진 채 가방 구석 이곳저곳에 방치돼 있었다. 과제나 선생님이 준 프린트를 고이 보관하라고 파일을 가방에 넣어줬거늘, 파일은 텅텅 비어 홀로 구겨져있고 지저분한 종이들은 제각각 흩어져있었다.
기어이 난 구겨진 프린트물을 하나씩 펼쳐봤다. 그것들은 그동안 학교에서 중간중간에 확인용으로 봤던 받아쓰기 시험과 영어 스펠링 시험 테스트지였다. 학교에서 그런 시험을 종종 본다는 것은 알았지만 일 년 내내 보여준 적 없이 오리무중 사라졌던 흔적들이 그곳에 다 남아있었다.
아이가 확인하자마자 구겨서 당장 가방 속으로 내동댕이 치고 싶은 점수들이 펼쳐져 있었다. 20점, 30점, 50점.... 세상에, 첫아이 키울 때는 구경도 못해본 점수들이었다. 어려운 수학 문제도 아니고 그저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고 연습하면 맞출 수 있는 국어 단어와 쉬운 문장 테스트였다. 붉은 글씨로 적힌 어처구니없는 점수도 화가 났지만, 그동안 아이가 그 시험을 위해 노력한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더 분노가 치밀었다.
"넌 대체 학교를 왜 다니는 거야? 그냥 친구들이랑 놀려고만 다니니?"
결국 안에서 들끓는 용암이 터져 폭발했다.
어떤 순간에도 절대로 기죽는 법이 없는 둘째는 나의 폭발에도 눈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두 눈을 바짝 뜨고는 노려봤다. 자신은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듯이.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나의 총공격에 일말의 타격감이 없다는 듯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받아냈다. 거기에 말로 반항하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안다는 고수처럼 그저 눈빛으로 나를 제압했다. 결국 할 말을 잃은 나는 "얼른 학교나 가라"는 말로 말을 맺었다. 나의 외침과 당부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학교 가기 전에 늘 "사랑해,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라고 말해주곤 했지만 오늘만큼은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아한 마음으로 한 주를 시작하는 활기찬 월요일을 기대했건만, 역시 예상대로 되는 일은 별로 없다.
일단 심호흡을 했다.
심호흡을 몇 차례하고 가만히 눈을 감아 아침의 풍경을 돌아봤다.
아이의 짜증을 유연하게 받아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저 찾아야 한다는 동화책만 찾아주면 됐을 텐데.
책가방을 열어보지 않아도 됐을 텐데.
구겨진 종이를 굳이 펼쳐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시험 점수 그게 뭐 중요하다고 화를 냈을까, 아이를 다그칠 것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물어보면 좋았을 텐데. 학교 가기 직전에는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들어가게 해도 됐을 텐데.
온통... 텐데가 가득했다.
최근에 읽은 권여선의 <각각의 계절>이 생각났다.
소설가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소설로 뽑혔다고 해서 고민 없이 샀던 책이다.
장편인 줄 알았는데 7권의 단편으로 구성된 책이었다.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하는지라 사놓고도 선뜻 손이 안 가다가 겨우 단편 하나만 읽었다.
첫 단편이 <사슴벌레식 문답>이다.
대학 시절 같은 하숙집에서 늘 붙어 다녔던 4명의 여자 친구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절부터 어느덧 30년이 지났다. 그중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다른 세 명은 죽은 친구의 추모 모임에도 오지 않는 사이가 됐다. 찬란한 청춘을 함께했던 이들이 30년이 지나도 그 우정을 지속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도, 소설도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소설의 화자는 그들이 어쩌다가 이런 결말을 맺게 된 것인지 과거를 회상하며 생각해 본다. 그 회상에 정점은 그들 넷이 함께 강촌으로 1박 2일 여행을 갔던 일이다.
그 여행 숙소에 도착해서 청소를 하는데 사슴벌레를 발견한다. 엄청나게 큰 사슴벌레.
사슴벌레를 보고 친구 하나가 묻는다.
"도대체 이렇게 커다란 사슴벌레가 어디로 들어오는 걸까"
그 질문에 누군가 대답한다.
"어디로든 들어와."
이 대답에 감탄한다. 어디로 들어오냐고 묻는데 어디로든 들어온다는 대답은 의젓하고 멋지기까지 하다.
그 뒤로 친구 둘은 그 문답을 따라 한다.
"넌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난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
이들은 이 문답을 '사슴벌레식 문답'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흐르는 강처럼 의연한 말투가 중독될 만큼 와닿았다. 독자인 나도 따라 하고 싶을 만큼.
물론 이 사슴벌레식 문답의 최후는 그리 아름답지 않다. 의연하고 멋지다고만 생각했던 이 대답은 그들의 관계가 얽히고 현실의 문제에 당면하면서 잔인하고 무서운 말로 바뀐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나는 어떻게든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미안하지가 않아?"
"어떻게든 미안해지지가 않아."
사슴벌레식 문답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그 결과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변명하는 말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든'이라는 한 글자로 잔인하고 가슴 아픈 숙명을 가차 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침에 아이에게 화를 내고 온종일 이 사슴벌레식 문답이 떠올랐다.
"어떻게 아이에게 화를 낼 수 있어?"
"어떻게든 아이에게 화를 낼 수 있어."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 있어?"
"어떤 엄마든 그럴 수 있어."
이렇게 혼자 묻고 대답하고 보니 의연하게 그 상황을 초연한 엄마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든'이라는 한 단어 뒤로 반성과 책임을 회피하고 꽁꽁 숨기고 싶은 내 진짜 마음도 보게 됐다. 누구'든' 그럴 수 있고, 어떤 엄마'든' 그렇게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다 괜찮은 것은 아니다. 유연하게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야겠지만, 그 뒤로만 숨어서 사람은 원래 그런 존재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무력감으로 결론내서는 안된다.
심호흡을 다시 크게 해 본다.
아이는 어떻게'든' 자랄 것이고, 엄마인 나도 어떻게'든' 살 것이다.
때로는 '든'의 힘에 기대어 살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엄마로서 나는 '든'을 넘어서서 온전한 의지적 사랑으로 이 삶을 잘 꾸려가고 싶다.
먼저는 아이에게 아침에 못해준 포옹과 '사랑해'라는 말부터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