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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 Sep 11. 2023

사회 초년생의 짧은 방황

생계보다 적성을 찾았던 사회 초년생

대개 누구나 그러하듯 대학졸업 후, 남들처럼 취업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일부 사람처럼 대학원 진학이나 유학은 내게 꿈조차 꾸지 못하는 일이었다. 얼른 취직해 돈을 벌어 어려운 가정형편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돼야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1995년은 경제 호황기였다. 한 해에 수십 만 명의 대학 졸업자가 쏟아져 나왔고, 경제 활황을 타고 대기업, 공기업, 중소기업 가리지 않고 신입사원을 대거 채용하였다. 

독문학을 전공한 나는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그저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부터는 어느 곳이든 취직해서 월급을 받아야 했다. 그 해 부터는 학생 신분이 아니었기에 백수가 되지 않으려면 얼른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그 당시에 방문 학습지 사업이 엄청난 붐을 이루었고 규모가 큰 교육기업에서 대졸자를 신입 공채로 많이 뽑았다. 졸업 즈음 나는 꽤나 큰 학습지 회사에 원서를 내고 면접 보고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그런데 1월 중에 서울 외곽의 회사 연수원에서 일주일간 신입사원 연수 교육을 하라고 통보가 왔고, 나는 그 연수원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동 탈락했다. 

놀 수가 없어서 어느 방문학습업체에 다시 원서를 냈고 3월부터 동네 지점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지점에 출근해 오전에는 사무실에서 교육받고 점심 식사 후 선배 교사를 따라 다니며 집집마다 방문하였다. 


서울 도봉구 쌍문동. 

야트막한 산 자락 아래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 있던 동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당시 내가 살던 누추한 집처럼 친구 한 명 부르기도 민망한 집들이었다. 당시에 차량 없이 집집마다 걸어 다니니 저녁에 집에 오면 다리가 아팠다. 사실 다리가 아픈 것 보다는, 낯선 타인의 집을 방문하다는 것이 불편했다. 비록 가정방문 학습교사라는 명분이 있지만,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내게는 낯선 타인의 집 내부 만큼 이 일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가난한 동네에서 초라한 내 집과 딱히 다를 바 없는, 고만고만한 집에서 내가 하는 일도 시시하게 느껴졌다. 


내가 태어날 때 부터 살아온 집은 남들에게 자신있게 자랑하고픈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같은 반 친구를 우리 집에 데려온 적이 없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학기 초에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했었다. 나는 초라한 우리 집을 선생님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약속된 날에 집에 가지 않고 멀찍이 전봇대 뒤에 몸을 숨겼다.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 문 앞에서 엄마와 잠깐 얘기하다가 돌아가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 

다음 날, 나는 선생님 얼굴을 보는 것이 왠지 민망했다. 

‘선생님은 나를 아주 잘 사는 집안의 딸로 알았을 텐데, 우리 집을 보고 나에게 실망했겠지…’ 

교복을 입었던 당시, 난 귀티하는(?) 내 얼굴과 달리 한없이 초라한 내 집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나 보다. 열일곱 살에 이미 마음속에서 소설을 썼던 것이다.

    

방문학습 교사의 일이긴 했지만, 갈수록 집을 방문하는 마음이 무거웠다. 결국 일 주일 만에 일을 그만 두었다. 아주 나중에 나는 ‘적성’에 대해 배우면서 사회초년생 때의 그 일이 내 적성과는 맞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기에 연수교육에 불참했고 가정방문도 낯설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사회에 발을 막 내딛었을 때 시작한 일이, 내 적성에 맞았다면 이렇게 금세 그만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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