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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 Sep 13. 2023

임영웅이 살던 동네

영웅이는 스타돼서 떠나고 나는 그 동네 들어가고

2020년 접어들면서 사상 초유의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치고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도 코로나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당장 사람들의 입에는 마스크가 씌어졌고 근처 슈퍼마켓에 가는 것도 조심스러운, 정말 상상도 못 했던 불안정한 일상, 자유롭지 못 한 날들이 시작되었다.


그 즈음 종편방송에서 처음 열린 ‘미스터트롯’ 노래경연에서 ‘임영웅’이라는 건실한 청년이 대상을 탔다. 그야말로 ‘코로나 시대의 트롯 스타’가 탄생했다. 그동안 수많은 가요, 노래 경연대회에서 1등 했다고 이렇게 스타로 떠 오른 경우는 드물다. 임영웅이 그 이름처럼 대중의 영웅으로 각광받은 것은, 의외로 젊은 청년이 우리 고유 음악 트롯으로 한국인의 한과 정서를 자극했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코로나가 터진 시기에 맞춘 듯이 임영웅이 등장한 타이밍은 결정적이었다. 


코로나로 일상이 멈추니, 장사가 안 돼 자영업이 무너지고 실직자가 속출하는 등 역사상 처음 겪어보는 전염병 사태는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사람들은 주로 집에 갇히면서 외롭고 공허해졌고 임영웅을 비롯해 김호중, 정동원 등 젊은 트롯 스타들의 노래로 그나마 작은 위안을 얻었다. 그 중에 임영웅은 가히 스타로 부상하였다.


나는 임영웅이 마지막 결승전 무대에서 부른 ‘배신자’를 들으며 새로운 스타를 예감했다. 트롯 음악에 관심 없던 내가 임영웅의 노래에는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그 때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당시 남편이 포천에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포천의 중심지인 송우리에 CGV 영화관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임영웅이 1등하고 어머니가 송우리에 미용실을 한다는 것이 알려져 한번 가보고 싶었다. 방송이 끝난 3월의 그 다음 주 토요일 우리는 송우리에 갔다. 송우리 시내에 있던 임영웅 어머니 미용실을 찾았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그 때 계단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 60대 정도로 보이는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어디에서 오셨어요?”

“수원에서 왔어요!”

“어머나, 수원에서 포천까지 이렇게 먼 곳까지 어떻게?”

“임영웅 노래를 너무도 좋아해서 어머니 가게라도 한번 보고 싶었어요!”


노부부는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임영웅이 대상을 탄 후에 전국 각지의 팬들이 어머니 미용실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우리는 그날 ‘6월 그랜드 오픈’ 현수막이 붙은 CGV 영화관 앞에 가보고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왔다. 송우리는 포천의 명동처럼 없는 게 없는 번화가였다. 송우리 시내 한 쪽 길에는 임영웅이 나온 송우초등학교가 자리했다. 초봄에 가보았던 포천 송우리는 그렇게 인상 깊게 남았다.


그리고 그 해 7월, 우리는 갑자기 이사를 해야 했다. 남편 직장이 있는 포천으로 가야겠다고 알아보다가 송우리가 생각났다. 임영웅이 살았던 동네, 초봄에 잠깐 방문했던 동네.

‘그래, 나에게 포근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송우리로 알아보자!’


나는 인터넷에 부동산을 뒤져서 가격이 알맞은 송우리의 한 아파트를 발견했다. 주말에 남편과 부동산을 방문했고 매물 나온 아파트를 보았다. 앞 뒤 베란다가 탁 트이고 저층이라 나무들이 베란다 앞에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앞 뒤 따지지 않고 그날 가계약을 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우리는 송우리로 이사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서울에서 근 40년을 살았고 경기 외곽에서 몇 년 살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만족도가 높다. 포천은 아직 지하철은 없지만 자연과 도시가 공존하면서 한적하면서도 활기 있고 살면 살수록 정감이 간다. 

임영웅은 일찌감치 이 동네를 떠났지만, 나는 이 동네에서 신출내기 작가로서 비상을 펼치고 있다. 거실 베란다에 놓인 커다란 책상에 앉아 창밖의 나무를 보면서 글을 쓴다. 어느 새 이곳에 온 지 3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꿈을 꾸면서 글을 쓰고 있다. 


포천의 아들에서 전 국민의 아들이 된 임영웅. 이제 그는 포천에 없지만, 그가 포천에 다시 올 일도 없을 테지만, 나는 이곳에 시민으로 살고 있는 것이 기쁘다. 그리고 이 지역 출신인 임영웅이 나에게 좋은 기운과 행운을 전해주는 기분이 든다.

나는 이곳에 이사오면서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언젠가 임영웅처럼 스타가 돼서 이 동네를 떠날 지도 모르지. 가수만 스타가 되나? 작가도 충분히 스타가 되는 시대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그저 열심히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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