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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 Sep 06. 2023

국민참여재판, 그림자배심원

“여기, 피고인 어머니 나와 계시지요?”

판사가 근엄하게 물었다. 초로의 여인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섰다. 

판사는 어머니에게 피고인의 향후 계획을 물었다. 

“앞으로 피고인은 어떻게 살 겁니까?”

“애 삼촌이 공장을 하고 있는데, 아들이 거기서 기술을 배우며 일하기로 했습니다.”

“어머니는 앞으로 피고인이 나쁜 길로 가지 않게 잘 돌보겠습니까?”

“네, 판사님, 이제 아들과 함께 살기로 하였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가 옆에서 꼭 보살피겠습니다.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고개 숙인 어머니의 초라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작은 어깨가 가늘게 들썩이고 목소리가 떨렸다. 어머니는 자신이 죄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들 대신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몇 년 전, 난생 처음 국민참여재판에 그림자배심원으로 참여했다. 재판정에는 무거운 공기가 돌았다. 이곳에서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법의 심판대에 서고 이에 합당한 판결을 받아 죄 값을 치른다. 일련의 재판 과정에는 ‘인간의 원초적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사건의 피고인으로 나온 이는 서른 살 정도의 남자로 몸집은 컸으나 키가 작았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색 바랜 풀색 수의복을 입은 그는 주눅들어 고개를 들지 못 했다. 

‘평범하고 순박해 보이는 사람이 어쩌다 저런 짓을 저질렀지?’

그가 저지른 죄의 무게를 따지기 전에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이윽고 검사가 사건 개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전원이 켜지고, 관련 사건의 사진이 순서대로 나오면서 설명이 이어졌다. 마치 회사에서 직원이 프레젠테이션을 하듯, 당시 일어났던 사건이 모니터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재판도 어느 새 정보화 시대에 발맞춰 진화하고 있음을 느꼈다.


피고인 A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 탓에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 했다. 홀어머니와 지방에 살다가, 서울에 혼자 올라와 허름한 월세 방에서 살았는데 직장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계속 취직이 안 되고 돈은 떨어지니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그는 세상을 원망하고 분노를 키웠다. 며칠 째 잠을 이루지 못 하던 그는 어느 날 새벽 무작정 집을 나와 불이 훤히 켜진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물건을 고르는 척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는 점원인 아르바이트생에게 문구용 커터 칼을 내보이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점원이 테이블 아래의 비상벨을 눌러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되면서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어느 나라든 빈부의 격차는 있지만 대한민국은 국민총생산 3만 불의 경제대국이다. 이런 나라에 사는 젊은이가 생계가 어려워 굶주리고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암울한 일이다. 

피고인은 왜 원망과 울분을 쌓아가며 결코 해서는 안 될 범죄를 저질렀을까. 어쩌면 피고인은 혼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진 외톨이가 아니었을까? 주변에 상의할 사람 하나 없고 도움을 청할 친구 하나 없이 오롯이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지 않았을까. 


피고인 A씨에게 딱한 사정이 있더라도, 사람을 흉기로 위협하고 돈을 내놓으라는 행위는 결코 해서는 안 될 범죄다. 작은 커터 칼이긴 하지만 엄연한 흉기이다. 설사 흉기를 사용하지 않고 보이기만 했더라도 그의 행위는 정당화할 수 없다. 특히 20세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느꼈을 공포는 감히 상상조차 안 된다. 그 아르바이트생도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어렵게 살아가는 젊은이다.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열심히 살아가던 젊은이가 그런 끔찍한 일을 경험했으니 그 공포와 트라우마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고개 숙인 피고인 옆에 선 국선 변호인이 말했다.

“피고인이 오랜 시간 궁핍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 끼니조차 잇지 못하자, 분노와 원망이 쌓인 끝에 우발적으로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이 바르게 살기로 하였으니 선처를 바랍니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죄와 사람을 가위로 딱 자르듯 구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던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장발장에게 가혹한 형벌이 답은 아닌 것처럼.

재판을 꼼꼼히 참관한 배심원들은 다른 방에서 따로 평결 회의를 거쳤고 만장일치로 집행유예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는 의미일 것이다.

이 사건은 결국 피고인이 초범인 점,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은 점, 범죄가 미수에 그친 점, 교화 가능성이 있는 점, 배심원의 판단 등 여러 가지 정황이 참작되어 집행유예로 판결되었다. 

“감사합니다, 판사님, 아들을 용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재판관을 향해 거듭 감사하다고 고개 숙인 어머니의 뒷모습이 애잖했다. 


국민이라면 한번 쯤 직접 재판 과정을 경험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참여재판 그림자배심원을 하려면, 본인의 거주지 각 지방법원 홈페이지에 신청하면 된다. 

그림자배심원은 방청객으로서 형사 재판 과정을 참관하는 것이며 수당이 없다. 

참고로 국민참여재판 시, 사법 절차에 따라 평결하는 배심원은 각 법원에서 18세 이상의 국민을 무작위로 

선출하며 참여 시 수당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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