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주변에는 이런 사람이 있으신가요?
우리 팀에 있는 '대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유형
월요일 아침마다 팀 티미팅을 한다.
월요일 아침 날씨와 상관없이 축 쳐진 기분에 티미팅은 그래도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시작되니 활력을 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그러나 그 기대는 서로 '소통'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여지없이 그저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판명된다.
팀 안에는 좋은 사람들도 참 많다. 그러나 팀의 구성원들은 어떤 기준에 따라 선별된 인력들이 아니고 사회에서 흔히들 볼 수 있는 보통의 사람들로 샘플링된 집단이다. 즉 이런 인간, 저런 인간 온갖 인간 종류들이 다 모여있다는 뜻이다.
팀에 유독 대화만 하면 참 못생겨 보이고 못나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과는 대화를 5분 이상 이어나간다는 자체가 참 고통이다.
이번 주 월요일에는 가만히 팀 안에서 '대화하면 못나 보이는 휴먼 top 3'의 대화법을 지켜보고 특징을 정리해보았다.
편의상 등장인물을 A, B, C라고 부르겠다.
이름의 이니셜을 콕 찝어 말하고 싶으나 혹시나 동료들이 나의 브런치를 보면 누군지 알아차릴 수도 있기 때문에 맛있는 ABC 초콜릿으로 대신한다.
A 씨는 유독 아는 게 많은 사람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한마디 거들어서 덧붙일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이 많은 것 같다.
때로 우리는 부정확한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뭐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거 아닐까요.?'
부정확한 정보가 대화 내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현상에 대한 스스로의 견해를 덧붙일 때 저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혹은 부정확한 정보가 대화의 본질이 아니라 부차적인 설명일 때도 있다.
누군가 틀린 말을 해도 그게 뭔지 알아먹을 수 있으면 보통은 그냥 넘어가 준다.
왜냐하면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
그러나 그는 어떠한 순간에도 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팩트체크를 해준다.
'그건 아니고요, 그게 아니라,...'
누군가가 말하고 있는 중간에도 그는 교정을 멈추지 않는다.
그가 그 '지적질'을 시작하면 때로 대화의 물줄기는 본질을 벗어나 A만의 '알쓸신잡'이 아니라 '알쓸잡'이 되어버린다. 사실 그 잘난 척이 진짜 근거가 있는 것인지 믿어도 되는 것인지는 모른다.
* 알쓸신잡 :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라는 TV 예능 프로그램의 이름이다.
* 알쓸잡 : '알아두면 쓸데없는 잡소리'라는 잘난 척으로 점철된 시간을 좀 먹는 대화법을 이렇게 불러본다.
비행 공포증이 있어서 해외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다는 그가 '거기서 사진을 찍으면 이렇게 나와요.'라고 말한다든지..
책에서 읽어서 혹은 누군가로부터 들어서 아는 간접 경험을 얘기할 때 우리는 '거기서 사진을 찍으면 이렇게 나온다고 하더라고요.'라고 말을 한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겪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발언에 신뢰성과 확신을 더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인지, 항상 스스로 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같은 대화법은 정말 듣고 있자면 '재수 없기'그지없다.
'그거 어디서 나오는 내용인데요?, 정말 믿을 수 있는 건가요?, 거기 안 가보셨잖아요.'
라고 따져 물어서 이 미팅 시간을 100분 토론장으로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모두가 그래 봤자 건질 것 없는 승자 없는 전쟁이 될 것 같아서 그냥 '아.. 네' 하며 어정쩡한 접대용 썩소를 날린다.
그는 몇 년 전 사이클 동호회에서 왕따를 당해서 사이클을 타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대화법으로는 어딜 가나 환영받기 어려울 텐데.. 제대로 대화하는 법부터 알려주고 싶다.
팀 미팅을 하다 보면 팀 업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우리 팀에는 책임과 관련해서 '유체이탈적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이 있다.
B 씨는 모든 팀의 업무로부터 어느 정도 한발 물러나 있다.
B 씨의 직책상 그러면 안 되는 자리임에도 그는 늘 방관자적 자세를 견지한다.
그것까진 좋다.
그러나 어떤 이슈가 생겼을 때, 일이 잘못되었을 때, 누군가 책임을 지고 그 문제를 바로 잡아야만 할 때,
그는 늘 '유체이탈적 화법'을 펼친다.
최근 외부 손님들이 오는 행사가 있었다.
행사가 다 끝나고 그가 나를 불렀다.
'애들 너무 믿으면 안돼요.'라고 말했다.
우리 팀 막내가 네임카드에 오타를 낸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챙겼네요.'
행사를 관리해야 하고 손님들을 가이드해야 하는 역할을 맡은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는 이 행사의 전체 총괄이며 책임자이다.
행사장 세팅을 맡았던 팀원들과 나는 그에게 행사장 확인을 해달라고 요청했었다.
보통 자잘한 실수들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컨펌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행사장을 미리 점검해주지 않았다.
'맡은 일은 어떻게든 완벽하게 해내야 합니다. 서류에 이름이 잘못 쓰여있으면 얼마나 기분 나쁜 지 알아요?'
그는 주말을 지내고 온 아침 티 타임 시간에도 이 얘기를 꺼냈다.
사실 책임 소지를 따진다면 모든 일은 막내, 나, 그까지 누구 하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책임의 경중을 따진다면 더 막중한 업무를 맡은, 전체 행사 총괄인 그의 책임이 더 중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마치 자기의 일이 아닌 양, 한 발짝 멀리 서서 관련자들의 잘못을 지적질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리더이다. 그는 먼저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있고 우리를 포용해줘야 하는 자리에 있다.
그가 만약 다음과 같이 말했더라면 우리는 더 진심으로 미안하고 반성했을 것이다.
'네임텍에 오타가 있었습니다.
네임텍 만들 때 한번 더 확인해주셨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앞으로는 반드시 선임들에게 확인을 받도록 하세요.
그리고 2,3차 관리자들이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 꼼꼼히 챙겨야 합니다.
저도 이 행사의 총책임자로서 행사장 점검을 놓쳤습니다.
앞으로는 모두 각자 자기 위치에서 업무를 꼼꼼히 챙겨서 작은 실수도 나오지 않도록 서로 챙겨줍시다.
그리고 이 참에 이런 사소한 실수를 보완하기 위해서 체크리스트를 더 디테일하게 만드는 건 어떨까요?'
실수는 할 수 있다.
이후에 책임의 잘잘못을 따질 때 그 잘못에 나를 포함시켜 나부터 솔선수범하겠다고 말하는 자세야말로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마음을 살 수 있으며 행동을 하게 만든다.
관리자라면 단순한 책임 추궁과 비난에 그치는 '문제제기'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대안 제시'의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부부 사이에서도, 친구사이에서도, 동료들 간에도.
내가 관련자로 포함되어 있는 일에서 '유체이탈적 화법'만을 펼치면 참 못나 보인다.
적극적으로 문제에 개입하고 해결을 하는 모습을 보일 때 비로소 참 멋진 사람이 된다.
얘기를 실컷 하고 났는데 왠지 '이용당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
C 씨는 거의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상대방과 본인을 비교하고, 본인이 좀 더 낫다는 포인트를 발견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서타일이다.
대화의 상대방은 C 씨의 심적인 위안을 주기 위해서 이용되는 도구일 뿐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절대 '경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화의 기본은 '경청'이지만 C 씨의 경우에는 일단 자기 말을 많이 한다.
듣는 것은 조금, 내 얘기 많이.
그의 대화 조리법이다.
그리고 참 기막힌 것은 대화의 말미에 그는 꼭 이런 얘기를 한다.
'OOO랑 얘기해봤는데, 걔보다는 내가 낫더라고. 돈 많으면 뭐해, 맘이 불편한걸.
OOO랑 얘기해봤는데, 이직하면 뭐해. 그냥 여기 있는 게 낫겠다 싶더라.
OOO 부사장 이번에 퇴직했잖아. 퇴직한 사람보다는 내가 좀 낫지 않나 싶어.
배차장이랑 얘기해보니 아직 멘탈 관리 좀 해야겠네. 난 이제 괜찮아졌거든. 힘내라고.'
나는 내 멘탈을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냥 가벼운 대화의 주제에 따라 업무 얘기, 약간의 불평.. 이런 평범한 직장인의 대화를 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멘탈 관리가 안 되는 사람이 되어있다.
그는 나의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계속 자기보다 열등하게 보이는 상대방의 일면을 찾고 그 상대방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을 스스로 위안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또 남의 말을 그렇게나 잘 전한다는 것이다.
'남'과 비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대화를 할 때 나 또는 그 사람이 대화의 주제이기보다 어제 만났던 누군가, 며칠 전에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대화의 주요 주제가 된다.
나는 사실 '남'에 대해서 얘기를 듣는 걸 즐기지 않는다.
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도 부족한데 남에 대한 가십을 들으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그와 대화를 하다 보면 대화에 몰입하지 못하고 늘 겉도는 두 가지 생각이 난다.
하나는 이런 얘기를 듣고 있기엔 내 시간이 아깝다는 것. 두 번째는 오늘 나와 나눈 이야기도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것.
그래서 더더욱 말을 아끼게 된다.
그가 참 안쓰러운 것은, 비교 대상이 되는 '남'이 존재하지 않으면 본인의 가치를 제대로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비교'를 통해서 본인의 존재감을 인식해왔기 때문에 '남'이라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 없으면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조차 없다. 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지..
나는 언젠가부터 항상 달변가이고 유쾌하게 사람들과 얘기를 이어나가는 그가 이제 좀 마음이 아픈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외부에서 인정하는 말, 칭찬하는 말을 해주어야 살아갈 동력을 얻는다. 스스로 내면에서 본인을 세울 수 있는 에너지를 생산해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연료를 얻어 내 마음의 보일러를 돌려야 된다는 것.
그 연료를 공급해줄 사람이 없으면 그의 마음속은 얼마나 얼음장이 될까.
'남'이랑 비교할 수는 있다. 나도 자주 그러는 것 같다.
그러나 그걸 또 언어로 만들어 입 밖으로 발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가 '남'과 비교한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말로서 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남'과 비교한 자기의 생각을 또 다른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일 것이다.
자기의 생을 살면서 계속 '타인'과의 비교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그걸 또 '타인'에게 검증 받음으로 해서 더 큰 에너지를 얻는 사람.
사실 셋 중 가장 불행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나는 대화할 때 어떻게 보이는 사람인가를 생각해본다.
혹시 못나 보이는 사람은 아닐지..
대화를 통해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고싶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나를 돌아보고 나를 반성해본다.
대화하면 할 수록 아름다워보이는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