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
재작년에 퇴사한 본부장이다.
대표가 바뀌면서 대표가 우르르 달고 들어왔던 낙하산 본부장 중 한 명이었던 그는 퇴사 후 몇 번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일까.
그는 브런치 나의 첫 글 소재의 주인공이다. 그와 함께 일하는 동안 그의 꼰대력 때문에 많이 힘들었고, 그는 많은 글 소재를 제공해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나에게 브런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 나의 첫 번째 브런치 글 *
"휴가 갈 때 애 좀 팔지 마"
'배 팀장, 내가 부탁할 게 있어서. 레퍼런스 체크 좀 해줄 수 있어? 내가 지금 이직 인터뷰 중이거든.'
재작년에 대표가 채용 청탁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검찰 조사가 시작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대표는 결백을 주장하며 사임했고 그가 데리고 왔던 본부장 모두 대기 발령이 났다. 우리 본부의 본부장도 하루아침에 없어졌다.
그 후 새로운 대표가 오고 조직이 크게 흔들리면서 나도 팀장 보직에서 내려왔다.
아마도 그는 내게서 동병상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 회사에서 그가 근무하는 동안 그는 남자 팀장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레퍼런스 체크 같은 건 나에게 부탁해온 걸까? 내가 마음속으로는 그를 몹시 싫어했으면서 겉으로는 아마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던가 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느꼈나 보다. 나는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회사생활 오래 하면서 능구렁이가 다 되어버린 모양이다. 표정을 감추고 감정을 잘 눌러가며 그를 대했던가보다.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안 좋았던 것을 그가 잊어버렸거나. 여자를 특히 못마땅해했던 그였다.
누구든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흔쾌히 그의 레퍼런스 체크를 해주기로 했다.
사실 레퍼런스 체크하는 전화가 오기 전까지도 나는 그와 함께 근무했던 과거의 날들을 대충 다 잊고 있었다. 겪을 때는 정말 부당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지나고 보니 다 옛일이다.
그저 그나 나나 같은 월급쟁이일 뿐이다. 월급쟁이가 직장 구하려고 노력 중인데, 동업자 정신으로 같은 월급쟁이가 도와주어야 한다. 한때 나를 괴롭혔던 사람이었을지라도 그가 새 직장에서 또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헤드헌터와 레퍼런스 체크를 진행했다. 질문은 되도록 그에게 좋은 쪽으로 대답이 나올 수 있는 것들이었으며, 나는 최대한 성심성의껏 그의 장점에 대해서 설명했다. 순도 100% 객관적으로 대답할까,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전화를 받고 있는 나는 열심히 그의 좋은 점을 얘기하고 있었다. 차마 전화로 부정적인 얘기를 많이 할 수는 없었다. 아쉬운 점에 대해서 얘기해보라고 했을 때는 최대한 돌려서 말했다. 결론적으로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었다. 헤드헌터도 만족했는지 차주쯤 계약서에 사인하게 될 거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비즈니스 세계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전화를 끊고 나니, 그 분과 보냈던 시간들이 좀 더 디테일하게 생각났다.
분명 임원 채용일 텐데, 참 그분은 임원으로 모시고 싶은 분은 아니었다. 꼰대라면 일에서라도 직원들을 압도하든가, 일을 좀 모르면 덕장이든가.. 이랬어야 하는데, 그가 본부를 지휘하던 시절엔 정말 말 그대로 엉망이었던 것 같다. 비단 그의 역량이 모자라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여러 가지 환경적인 요건들도 참 따라주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레퍼런스 체크하면서는 그의 좋은 점이 더 많이 생각이 났다.
힘든 시간은 지나갔고, 그 힘든 시간을 지나면서 그리고 그 후에 서로 어려운 시간을 겪으면서 그에 대해서 가졌던 뾰족하고 날카로운 마음도 많이 마모되었다. 함께 일할 때는 그렇게 싫었는데 또 지나고 보면 추억이 되는 것 같다. 무엇이든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게 좋은 거니까.
그는 곧 다시 어떤 회사의 임원이 될 것이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다만 내가 있고 다른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항상 선악의 구도에서 나는 선의 편이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거나 나를 힘들게 하는 상사를 악으로 정의하고 미워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알고 있다. 100% 선도, 100% 악도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