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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슬 스커트 Sep 13. 2021

남겨진 자의 슬픔

고인물이 되어가고 있다.


처음 이 회사에 출근했을 때 나는 모바일 기획팀 소속이었다.

그 당시는 회사가 '모바일 no.1'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회사의 많은 리소스를 모바일 플랫폼 쪽으로 집중하고 있던 시기였다.

내가 몇 가지 이직의 옵션 중에 여기를 선택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1) 일이 많이 없고 편하다.라는 평가 2) 홈쇼핑 회사 중 모바일 플랫폼을 가장 강화한다는 비전. 이렇게 두 가지였다.

마흔전에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싶었던 꿈이 있던 나는 전 직장에서 이커머스 기획, 운영, MD, 글로벌 사업 등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경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인하여, 큰 계획도 없이 9년 넘게 다닌 전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때 모바일 스타트업이 조금씩 태생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 또한 사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실행 또한 준비된 자의 몫이라고 매달 받는 월급에 미련을 못 버린 나는 새로운 일을 찾으면서도 꾸준히 인터뷰를 보러 다녔다.

월급쟁이에 대한 회의감이 벌써부터 생겨나 충성하며 월급쟁이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좀 편하다기에,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현재 직장을 선택했다.


선택은 내가 한 것이고 선택 후 남는 후회도 내 것이다.


홈쇼핑 사업은 기본적으로 성장의 한계가 있는 사업이다. 지금의 회사는 이전에 서슬 퍼렇게 내놓았던 공격적인 비전도 사라지고 그저 차장급 이상이 편하게 정년 비슷하게까지 일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하고도 루즈한 조직이 되었다.


일에서의 희열을 함께 해준 후배


모바일 기획팀에는 여러 명의 기획자가 있었는데 그중에 얼굴이 말갛고 환하게 생긴 여자 후배가 있었다.

 후배의 가장 좋았던 점은 다르게 생각할  안다는 것이었다. 모바일 쇼핑몰을 써보면 UI 서비스가 거기거기인 경우가 많은데 서로 상호 간에 좋게 말하면 '벤치마킹'   쎄게 말하면 '카피'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온라인 사업의 취약점이자 묘미인 것 같다. 경쟁자들에게 보통 나의 전략을 다 노출하면서도 뒤따라오지 못하게 더 빨리 뛰어나갈 방법을 찾는 것.


쿠팡처럼 어마어마한 비용 투자를 지속해서 경쟁의 판을 아예 옮겨버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고만고만한 경쟁에서는 '더 빨리 뛰어나갈 방법'은 디테일에서 온다. 누가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하느냐, 좀 더 다르게 고민하느냐, 그리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더 많이 움직이느냐. 이것이 그 회사의 스피드를 좌우한다.


따라서 서비스 기획자가 기획하는 UI에서 보여지는 결과물이 아주 큰 차이가 없더라도 좀 더 깊이 있게 고민하고 작은 것들을 바꿔나갈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격차가 벌어지는 법이다. 대부분은 결과적으로는 경쟁사와 유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크게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모바일 서비스 기획'이라는 것을 학문적으로, 체계적으로 배우고 입사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 서비스 기획자의 실력과 기술은 경험을 통해서 연마된다. 경험이 많건 적건 간에 현업에 투입되면 누구나 스토리보드를 그려내고 그것이 정답처럼 서비스에 반영되기도 한다. 그 품질에 상관없이.


그러나 이 후배는 그런 디테일을 고민하고 만들 줄 아는 기획자였다. 다르게 생각하려면 생각이 편향적이고 뻔하지 않아야 하며 여러 가지 상황을 동시에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서비스 기획을 하면서 함께 토론을 먼저 했고 아이디어를 교환했다. 고맙게도 나를 선배로 인정해주고 나의 경험을 존중해주는, 훌륭한 에티튜드의 후배들이 있었기에 나는 퍼실리테이터 역할을 하였고 후배들이 실제적인 아이디어를 내며 멋진 서비스 기획안을 완성하였다.


일에서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아주 짧고 강렬하다. 회사생활 20년 넘는 기간 동안 일에서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찰나와 같다. 보통은 좌절과 상처, 버티기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나를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힘의 원동력은 반짝반짝 빛나던 한 때의 행복했던 기억 때문인 것 같다. 지금 회사에서 내가 일에서의 가장 기쁨을 느끼던 순간에 그 후배가 항상 옆에 있었다.



저 다음 주까지 나와요.


며칠 전 그 후배가 뜻밖의 메신저를 보내서 한참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퇴사한다고 했다.

후배도 회사를 많이 아끼고 좋아하던 친구였기 때문에 막연하게 회사를 떠나게 되면 내가 먼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먼저가 되었다. 사실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점점 살망만 거듭되는 조직에서는 탈출만이 길이기는 하다. 장점도 무척 많은 회사이긴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리더들이 여과 없이 쏟아내는 조직장으로서의 시행착오를 겪어 내기엔 상처가 너무 크다.


좋은 결정이라고 축하해주었다. 이직이란 플러스만 되는 선택은 절대 아니다. 적응하고 받아들이기까지 후회를 거듭할 것이고, 서서히 나빴던 기억이 증발해버려 좋았던 순간만으로 포장되어버린 옛 직장과의 비교로 한동안은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해보는 선택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치 너무 여러 가지 고려사항이 많아서 결혼 적령기를 놓쳐버린 과거의 노처녀처럼 회사에 머물러있다. 위치, 연봉, 복지, 포지션...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는 없다.

직장의 모든 조건이 다 좋기를 바라는 것은 키 크고 잘생겼는데 명문대를 나왔고 좋은 직업에 집안도 훌륭한데 성품까지 온화하기 그지없는, 현실에는 없는 남자를 찾는 것과도 같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런 마음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이직할 수 없는 거라고.


후배의 용기에 진심으로 응원해주었다. 그러나 마음이 쓸쓸하다. 언제나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주 만나지도 못했던 후배를 이제 정말로 더 보기 어려워졌다. 역시 사람은 있을 때 잘해야 하는 법이다.


나이 많은 내가 먼저 떠날 줄 알았기에 그녀가 회사에 부재하는 상황은 생각조차 안 해봤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관계도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있다. 하물며 영원히 살 것만 같은 나의 삶도 끝이 있을 텐데, 세상에서 가장 이별을 많이 하는 곳인 회사에서야 당연한 거 아닐까.. 이렇게 머릿속으로는 이해가 되는 일이었지만 가슴이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음으로 감사하던 대리의 퇴사


재무팀 담당자가 바뀌었다. 나의 실무가 재무팀의 업무와 연관성이 많기 때문에 언제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어쩐 일인지 담당자가 바뀌었다고 한다.

팀장 보직을 내려놓고 실무를 시작하게 되면서 정산을 하는 사소한 일들이 엄청 크게 다가왔다. 실무 관련하여 프로세스에 서툴렀고, 시스템도 사용할 줄 몰랐다. 그때마다 친절하게 알려주었던 재무팀 대리에게 무슨 일일까..


메신저로 말을 걸어보니 퇴사를 한다고 한다. 게임 스타트업으로 간다고 하는데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홈쇼핑 회사도 좋은 직장이지만 좀 더 어렸을 때 도전하고 변화를 해야 더욱 성장할 수 있다. 이런 것을 10년 전에도 알았더라면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직을 하거나 변화했을 것 같다. 변화에 적응하는 것도 경험이라서 자주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는 사람은 변화 근육이 많이 발달해있어서 적응하고 성장의 기회를 찾는데도 훨씬 수월할 것 같다.


떠나는 후배들, 남겨진 자의 슬픔


회사 생활 20년을 훌쩍 넘기다 보니 참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정말 평생을 함께 일할 것처럼 치열하게 싸우고 신경을 곤두 세우며 경쟁하던 동료가 몇 달도 안되어서 그만두는 일도 있다. 또 영원히 나의 멘토가 되어줄 것 같았던 선배님들도 어느새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지금 내 옆에 있는 팀원들도, 영원히 나를 갈굴 것만 같은 상사도 언제까지 함께 일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 직장에서 워낙 까다롭고 포악하던 한 본부장이 있었는데, 어떤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힘내자. 본부장님이 회사 오래 다니겠어, 네가 더 오래 다니겠어? 네가 더 오래 다녀. 지금 크게 생각할 일 아냐.'


'그래. 본부장님은 나보다 나이 많으니까 훨씬 빨리 그만둘 거야.' 선배의 말은 일리가 있었고 막연하게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후배들보다 선배들의 퇴사가 훨씬 자연스러웠다.

요즘엔 보직에서 밀려나거나 후배를 팀장으로 모시게 되거나 혹은 발령이 전혀 생소한 쪽으로 나더라도 쉽게 사표를 던지지 않는다. 바깥은 그만큼 혹독하고 퇴직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고, 이직하기에는 이제 너무 늙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엔 '이직=능력'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 또한 남겨진 나이 많은 자가 되어 가고 있다.

능력을 인정받아서, 더 나은 일을 찾아서, 더 발전된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 떠나는 후배들의 등을 쓸쓸히 지켜만 봐야 하는 남겨진 자가 되었다. 나만 뒤쳐지는 것 같고 나만 변화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하다. 소위말해 고인물이 되어가고 있다. 고여있기만 하면 결국 썩을텐데, 변화의 고통을 감수하기 싫어서 머물다보면 결국 썩을텐데..오늘 나의 위치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후배들이 떠나는 회사.

남겨진 자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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