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펜슬 스커트 Aug 04. 2021

여고생의 내면을 성장시킨 왕따의 기억과 94년 여름

내면적으로 가장 크게 성장했던 시기였다.

여고생의 내면을 성장시킨 왕따의 기억과 94년 여름

고2 때 깨달은 인생의 큰 진리 3가지


1.  세상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밖에 없다.

2. 남의 말을 쉽게 하면 안된다. 

3. 누구나 비호감이 될 수 있다. : 왕따가 되는 아이가 이상한 아이가 아니다



왕따의 기억


내가 인생에서 무엇이든 내 맘 같지는 않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한참 입시를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할 고2 때, 나는 반에서 일종의 왕따를 당했다.


어느 순간 학교 매점에 같이 가줄 친구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수업시간에 발표를 마치고 났을 때 친구들의 반응이 유난히 싸늘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집에서 셋째였던 나는 어려서부터 타협하고 수용하는 것을 배워왔기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주장이 강하다거나 고집을 피우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이런 나를 엄마는 항상 '성격이 좋다'라고 칭찬해주셨다. 처음에 반 아이들이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정말이지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내가 왕따라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엄마도 인정해준 '성격 좋은 아이'가 나이다. 친구들이 나를 안 좋아할 리가 없는데.. 대체 어쩌다 사랑받지 못하고 배척받는 아이가 되었던 것일까.


학년이 바뀔 때마다 매번 반에 대표적인 밉상이 있거나 누구나 믿고 거르는 바보가 한 명씩은 꼭 있었다. 그 아이는 그냥 뭘 해도 비아냥 또는 무시의 대상이 된다. 이미 '그런 아이'로 낙인이 찍혀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에는 내가 '그런 아이'가 되었다는 것을 정말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학교도 가기 싫었고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정해진 학교를 별일 없다면 끝까지 다녀야 하는 학생에게는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때 나는 알았다. 스스로 너무 멀쩡하다 못해 우수한 편이라고 생각했던 나도 반에서 대표 왕따가 될 수 있다는 것. 누구나 어떤 일이든 겪을 수 있다는 인생의 진리를 알게 되었다. 


살면서 최초로 특별했던 한 해, 1994년


1994년. 기록적으로 더웠던 여름이 있던 해였고, 불멸의 인물인 줄로만 알았던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사망한 해이다. 나는 1994년을 떠올리면 그 뜨거웠던 한 여름에 한낮의 뙤약볕 아래를 걷고 있는 교복 입은 여고생이 생각난다. 나는 지독하게 더웠던 여름날을 견디고 왕따의 아픔과 수난을 겪어내며 내 내면으로는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치열하게 생각하느라 더욱더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나를 특히 핵심적으로 싫어하는 우리 반 인싸가 둘이 있었다. 그 친구들의 영향으로 다른 아이들은 학기초에 나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나를 몹시 미워하고 증오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그 인물을 매일 봐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학교를 그만둘까, 죽어버릴까' 등교를 하면 아침부터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부에 집중하는 것은 몹시 힘들었고, 나를 감싸는 어색한 공기의 중압감으로 몸은 내내 천근만근이었다. 


그 더웠던 여름날 오전에 마무리되는 보충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고2 때를 돌이켜보면 늘 에너지가 바깥으로 향해있던 내가 처음으로 내 안으로 에너지를 사용했던 한 해였다.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고 세상의 여러 가지를 깨닫게 되었던 한 해였다. 


왕따의 시작


학기 초 반을 배정받고 갔더니 중학교 때 반장을 했었고 꽤 친했었던 명주와 한 반이 된 것을 알았다.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척을 했지만 명주의 반응은 뭔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고 나와 거리를 두려는 느낌이 들었다. 고2 첫 시험을 치고 성적표가 뒤쪽 벽에 나 붙었을 때 명주의 성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뭐 공부를 아주 탁월하게 잘하지는 못했지만 중학교 때 1,2등을 다투던 명주는 지금은 40명 정도 있는 학급에서 20등 이하의 성적을 내고 있었다. 공부를 꽤나 잘하던 명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첫 모의고사 이후에 솔직히 약간 놀랐었다. 


여기 이 시점에서, 내가 왕따에 이르게 된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꽤 대단한 인생의 진리를 이때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 내 맘 같은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즉, 내 마음속 의도를 헤아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


어떻게 짝이 정해지는 시스템이었던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튼 한 책상에는 두 명이 앉아서 공부를 하게 되어있다. 나는 늘 짝과 이것저것 얘기를 많이 했었다. 뭐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이니까. 자연스럽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옆에 앉아서 생활하고 공부하는 짝이랑 제일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된다. 학기초에 짝이 되었던 친구와 이런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났다. 


'명주가 중학교 때 정말 공부를 잘했는데 성적이 많이 떨어졌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아. 우리 중학교 때 진짜 친했었거든. 약간 나를 질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짝에게 했던 이야기는 딱 이런 정도의 맥락이었다.

그때 내게 너무나도 친절하고 다정하게 지냈던 그 짝이 이 이야기를 명주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 내 짝이 된 아이들도 둘 사이에 오갔던 이야기들을 명주와 다른 친구들에게 전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짝이 되는 친구들은 내가 하는 다른 아이들의 부정적인 얘기를 전달했으며 나를 실제 겪어보지 못한 반의 다른 아이들까지 나에 대해서 안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사실 짝에게 명주에 대해서 얘기를 할때 별 의도는 없었다. 진짜 그저 좀 성적이 떨어진 명주가 안타까웠다. 잘못이라면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 아무리 그런 의도가 아니라도 할지라도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는 건데, 너무 배려심이 없었던 것이다. 성적은 정말 예민한 문제이다. 더더욱 성적이 예전만 못한 아이에게는 그게 큰 고민일 것이다. 별 의도가 없다고 해도 나의 말은 명주를 상처주고 짝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왕따가 왜 되었을까를 여러번 복귀하며 정말 정말 뼈아프게 후회한 것이 너무 말을 쉽게 한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우주이다. 내가 그 우주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단정지어 말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로 나는 명주에게 사과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참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내게 내색조차 하지 않았던 짝들이 나의 불편한 동거인이었다는 사실을.

'은지야, 그런 얘기는 좀 좋지 않은 것 같아.'

'은지야, 그런 얘기는 혼자 생각하는 게 어때?'

'은지야, 네가 지난번에 OOO에게 했던 얘기, 반 애들이 다 알고 있는 거 알아? '

이렇게 한 마디라도 알려줬더라면 내가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짝이 들려준 얘기는 항상 그 시간에 즐겁게만 들었던 나는, 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른 제삼자에게 전한다는 것도 낯설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본인이 말도 한마디 안 해본 어떤 한 사람을 정의 내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naive 하게 무지하고 순진했던' 나는 혹독한 수업료를 치르며 몸소 알게 되었다. 


반의 많은 아이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정말 큰 슬픔이고 아픔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기본 욕구가 있다. 그 욕구가 철저하게 무시당했을 때, 내게 적대적인 감정들로 가득 찬 무리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람을 참으로 작아지게 만든다.



왕따를 이겨내는 나만의 방법


짝이었던 아이들을 찾아가서 '너 왜 그랬어? 네가 그랬지?' 이렇게 원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결국 내가 한 말이 화근이 되어 일어난 일이었기에 누군가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과 같은 방법으로 응수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대단한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다. 

"세상에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밖에 없다"는 사실.


반 친구들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 죽지 않고, 학교도 자퇴하지 않고 이 상황을 이겨내려면 내가 바뀌는 방법밖에 없었다. 정말로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하고 싶었고 공감과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그건 순전히 내 생각이었다. 내게 그런 호의를 베풀어줄 친구는 그 당시에 없었다. 나는 스스로 나를 바꿔서 이 상황을 이겨내야만 했다. 


나의 말이 실시간으로 다른 아이들에게 퍼져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 나는 아이들과 사적인 대화를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시작하지 않으면 퍼 나를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은 매점에도 가고 자리를 이동해가며 친구들이랑 놀았지만 나는 같이 놀 친구가 없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짝에게 쓸데없는 얘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 바쁜척하며 공부를 했다. 

또한 마음속으로는 내내 엉엉 울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아이들이 스스로 나를 찾아오게 만들고 싶었다. 떨어진 성적을 올려야 했다.


그 해 여름방학 때부터 나는 떨어진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독서실을 찾았다. 실제로 처음으로 독서실이라는 곳에서 공부를 제대로 해본 것 같다. 늘 독서실을 다니면서 고요한 공간에서 딴 짓을 많이 했던 나는 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했고 집중을 했다. 


지금도 어려운 진리 ; 내 맘대로 되는 것은 나밖에 없다..


고2를 무사히 넘기고 정규 교육 과정을 잘 마친 나는 지금도 생존해 있다.

그리고 마흔 중반이 되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너무 어렵지만 정답인 것은 '세상에 내 맘대로 되는 것은 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살아갈수록 세상은 내가 살고 싶은 대로만 살아지지 않고, 상황은 늘 내가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나는 때때로 비호감이 되었고 그럴 때마다 조금씩 위축되었다.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소심한 성인으로 자랐다.


어른이 되어서도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그 사람을 대하는 일은 아무리 반복해서 일어나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1994년 여름을 생각한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다만 내가 바뀌어야 한다.

그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도록 내 마음을 다스리고, 내가 사랑하고 나를 아끼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더 집중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어떠한 상황에서든 '내가 상처 받지 않아야 한다.'


환경적인, 관계적인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내 맘대로 되는 것이 나밖에 없다는 대단하고도 외로운 진리를 늘 되새겨본다. 


고2때 당한 왕따 사건은 나의 고등학교 시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되었다. 

나는 1994년을 기점으로 또 한번 내안으로 뒷걸음질쳐 들어갔다. 

돌이켜보니 늘 에너지가 바깥으로만 향했던 내게,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다지는 시간은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혼자있는 시간을 택하게 될 것 같다. 내면적으로 한번 성숙해지는 과정을 거쳤던 고등학교 시절이 있었기에 대학교를 다니면서는 내내 사랑받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전 10화 대화만으로 참 못나 보이는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