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펜슬 스커트 Nov 28. 2019

"휴가 갈 때 애 좀 팔지 마."

40대 직장인, 엄마 그리고 여자의 사건들

"엄마, 5월에 재량 휴가 있어요."


5월은 근로자의 날, 어린이 날, 석가탄신일 등 휴가가 많은 달이다.

날씨도 좋고 휴가도 많고...

어린이날 때문에 들뜨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1월 초부터 쉼 없이 달려온 직장인들에게도

5월은 눈부신 계절의 여왕임에 틀림없다.


학교에는 '재량 휴가'라는 것이 있는데,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여름, 겨울 방학을 조정하고 학기 중 쉴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방학이란 전국적으로 같은 날 시작해서 같은 날 끝이 나는 휴가였다면 최근에 학교는 시작하는 날도, 방학 기간도 각기 다르다.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5월에 재량 휴가가 있다.

올해는 5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 근로자의 날을 껴서 주말인 날들을 포함하는 일주일 가량의 짧은 방학인 셈이다.


"엄마, 5월에 재량 휴가 있어요."

아이에게 이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마음이 무겁고 고민이 되었다.


'점심은 어떻게 하지...?'

'집에 혼자 두어도 되나...?'


아직 혼자서 밥해먹기는 어린, 초등학교 4학년.

최대 3일간은 휴가가 필요했다.




"배 팀장, 휴가 갈 때 애 좀 팔지 마."


5월을 앞둔 4월 말의 어느 사업부 주간회의 시간이었다.

근로자의 날을 중심으로 해서 4월 말과 5월 초에 있는 징검다리 연휴에 휴가 계획이 있는지 본부장이 체크를 했다.


본부에는 본부장 포함 남자 실장이 두 사람 있고, 그 아래로 남자 팀장이 세명, 그리고 여자 팀장인 내가 있다.


남자 팀장, 실장 중 몇몇이 4월 말과 5월 초에 쉴 계획을 얘기했다.

나는 아직 휴가를 어떻게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3일을 다 내자니 일주일이나 되는 긴 기간을 쉬게 되는 것이라 눈치가 보이고, 안 쉬자니 아이가 걱정되었다.

최대한 아이의 밥을 챙겨줄 수 있는 친구 엄마를 섭외해볼 생각이었는데, 재량 휴가 기간 중에는 가족 여행이 많아 그조차도 여의치가 않은 상황이었다.


내 차례가 왔다.

내가 뭔가를 말하려 하자, 본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이런 때에 네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저, 아이가 재량 휴가인데 언제부터 언제까지 인지 정확히 몰라서, 휴가를 아직 확정을 못했습니다."


구구절절 변명이 나왔다.


"배 팀장, 휴가 갈 때 애좀 팔지 마. 툭하면 애 때문에 반차, 애 때매 연차.."

본부장은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나의 휴가 계획과 사유를 못마땅해하고 있었고, 모두가 있는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고스란히 표출하고 있었다.


..

사실 그러고도 몇 마디 서로 주고받기는 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상황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정당하게 내가 노동법상의 근로자로서 부여받은 휴가를 다녀왔을 뿐이고,

휴가를 왜 가냐고 물었을 때 사실대로 '아이의 전학', '아이의 학부모 상담'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배 팀장, 휴가 갈 때 그냥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대충 둘러대. 애 때문에 휴가 간다고 하면 어떤 상사가 좋아해.'라고 말해주시던 선배 여자 팀장님의 충고가 생각났다.


'애 좀 팔지 마.'라는 말이 내 가슴속과 머릿속에 너무 강렬하게 박혀버린 나머지, 그 회의의 마무리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그 자리에는 나와 본부장을 제외하고 다섯 명의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의 발언이 심하다든지, 우리의 대화를 말리는 그 누구도 없었다.


나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부끄럽기도 했고, 서럽기도 했다.




"내 아이는 사고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서러웠고, 억울했고, 분노했다.

내 아이는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다. 휴가를 간다고 할 때 나는 아이를 팔아본 적이 맹세코 한 번도 없다.


엄마가 직장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물건으로 전락해버린 아들에게 미안했다.


나는 전 직장 여자 동료 몇 명에게 그의 발언에 대해서 체크했다.

'징계감이다, 미쳤네, 여기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등의 반응이 돌아왔다.


그를 응징하고 싶었다.


처음으로는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를 생각했다.


그의 발언은 도를 넘었다고 생각되었고, 나는 앞으로 휴가를 가면서 구차하게 그에게 내 휴가를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법적으로 휴가의 사유를 묻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 들어가 글을 쓰다 브라우저를 닫아버렸다.


정말 내가 이 글을 청와대 사이트에 띄우게 될 경우,

'나는 이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을까?' '나는 어떤 회사라도 다닐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가족부로 전화를 했다.

여성가족부 상담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가 했던 말, '휴가 갈 때 애 좀 팔지 마.'를 내 입으로 반복할 때, 눈물이 나고 목이 매였다.


"마음 많이 상하셨겠네요. 그런데 여성가족부는 직장 내 성희롱 관련해서 상담을 해드리거든요. 이런 문제는 고용노동부로 전화해보셔야겠어요."


고용노동부로 전화를 했다.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될 것 같은데, 직장 내 괴롭힘은 신체적인, 정신적인 것까지 포함하거든요. 그런데 입증할 증거가 있어야 돼요. 녹취록 이든가 상황을 증언해줄 증인이든 가요."


전화를 끊고 회의실 상황을 다시 떠 올려 보였다.

'나를 위해 증언해줄 사람이 있을까?'

본부장이 내 휴가에 대해서 도를 넘은 발언을 하는 중에 살펴본 그들의 얼굴은 평온했다.

성차별인지, 남의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태도인지,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문제 삼고 적극적으로 이슈화할 때 나를 위해서 증언해줄 내편이 되어줄 만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휴가에 대해서 그가 얘기를 다시 꺼내려할 때 나는 그러지 말아 달라고 말을 했고, 그는 웃으면서 '협박이냐'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협박이 아니라 경고'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응징하지도 못했고,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이 일을 아직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일하는 여성이자 엄마로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여자이자 엄마로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불이익과 불평등을 겪어왔다.


물론, 남자들에게 얘기하면 '피해의식'이다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걸 어디 고발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40대의 직장인이자 엄마이자 여성으로서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그때 왜 그랬지' 싶었던 일들에 대해서 나와 똑같이 직장인이자 엄마이자 여성인 후배들에게 경험담으로 들려주고 싶고, 그 당시의 나의 선택이 옳았던 것인지, 다시 똑같은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하면 더 현명하고 덜 상처가 되는 대처법이 될지 공유하고 함께 얘기하고 싶다.


더불어 현명하게 당당하게 나와 같은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많은 여성 선배들로부터도 따뜻한 위안과 보듬음을 받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하는 글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