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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슬 스커트 Sep 09. 2021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언제나 변치 않는 내 편이 있으십니까?


'내 편'이 있다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안도감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속감이라는 심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서 삼삼오오 모인다.

내가 바라보는 직장이나 종교는 사람들이 소속감 속에서 안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내 편'이라고 할 때 나는 주로 가족을 떠올린다.

무조건적이지는 않을 수 있지만 가족은 대체로 나의 편이다.

나의 편이라고 해서 내가 불법을 저지르거나 사람을 해했을 때도 나를 무조건 옹호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가족 구성원이 이런 일을 했을 때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기에 '왜 그랬을까'를 깊이 고민하게 될 것 같고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이해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할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무조건적인 내편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모두 크고 작은 흠결을 가지고 있다. 이런 크고 작은 흠결들은 내가 속해있는 집단이 어떤 곳이냐에 따라 나에게 큰 고통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가 소속감을 얻고자, 함께 즐거움과 성취를 도모하고자 소속된 집단에서도 날카로운 검열들이 존재한다.

회사에서의 정치질은 도대체 내 편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게 만들고, 우리가 흔히 보는 정치집단에서의 서로 간 공세는 어제의 내 편이 오늘은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내 편은 작은 흠은 눈감아 주고, 큰 잘못을 하지 않도록 나를 지켜봐 주는 존재들인 것 같다. 

나이 들면서 '그래 네가 옳아. 난 네 편이야.'라고 말해주는 무조건적인 내 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편과 함께하는 작은 공간 바깥의 세상은 너무나 비정하고 차갑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소속감을 가지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속해서 활동했던 학교, 동아리, 회사.. 가족이 아니었던 집단들에서 나는 무한한 내 편의 지지를 경험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차라리 혼자 고립됨을 택하고 싶다. 커뮤니티 활동이 '필요할 때' 나를 도와주는 조력자의 손길이 될 것을 알지만 나는 필요할 때 의기투합하고 목적에 따라 뭉치고 흩어지는, 정서적인 본딩이 없는 내 편도 남의 편도 아닌 사람들과의 교류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변치 않는 내 편을 원한다.



인복(人福)


'인복 있는 사람'이 여러 면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인복이란 인적 네트워크와 유사한 개념인 것 같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귀인이 나타나서 나를 위험해서 구해주는 설화 같은 이야기는 현실에서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인복이 있으려면 평소 네트워킹을 잘해두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필요할 때, 내가 원할 때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스스로 아싸의 길을 택한, 고립됨을 선택한 나 같은 사람들은 인복에 쉽게 기댈 수 없다.

스스로 해내야 할 때가 많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고 하는데 인복을 사용하지 않으니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들의 결과는 미약할 때가 많고 그러다 보니 큰 성취를 경험하는 일은 쉽지 않다.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비슷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니, 결과가 안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직을 제안받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지인이 추천하거나 아니면 헤드헌터가 제안하거나.

지금의 직장은 우연히 상갓집에서 만난 옛 상사가 추천해서 오게 된 곳인데, 그가 다른 사업부로 떠나기 전까지, 아는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혜택인지 심적으로 알게 되었다. 

조직 적응의 문제, 일을 추진할 때 지지해주는 것, 내가 잘못을 했을 때도 내 편이 되어주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아는 사람과 함께 일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는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이직의 기회도 있었으나 나는 잡지 않았다.

영원히 나와 함께 일할 수 있는 상사가 아니면 그도 조직개편이나 이직에 의해서 곧 이별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복(人福) 없는 사람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인복을 불러들이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나처럼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인복이 없다고 한탄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어주는 분에게


함께 일하자고 자주 연락을 주시는 분이 있다. 

전 직장에서 나의 상사 중 한 분 이셨던 분인데, 내가 따로 연락을 자주 드리지 못해도 꾸준하게 안부를 물어봐 주시고 연락을 주신다. 내가 아주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해주시고 조직에서 내가 힘든 일을 겪으면 안타까워하시며 좋은 말씀을 아끼지 않으신다.

내가 딱히 잘하는 것도 없는데 그분이 데리고 일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 중 한 사람인 것 같다. 

어제는 다른 일 때문에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내가 제안한 거 고민해봤어요?'라고 하신다.

'제가 결정하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건가요?'하고 물었더니 '당연하지'하고 대답을 해주시는데 그 말씀만으로도 마음이 벅차고 너무 감사했다. 사람들의 팍팍한 검증과 배척하는 눈길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요즘 세상에서 나를 믿어주시는 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참 감사하고 엄청 든든하다.


지금의 직장보다 조건이 별로 좋지 못하더라도 나를 원하고 지지해주시는 분과 일하는 게 더 맞는 것인지, 아니면 직장에서의 내 편은 영원할 수 없으므로 지금의 내 길을 고수해야 하는지 선뜻 선택할 수가 없다.

또 다른 두려움은, 그 분과 함께 일했을 때 내가 실망시켜드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다. 나를 돌이켜보면 연애할 때도 상대방이 나의 모습을 더 깊이 알게 되면 실망하게 될까 봐 먼저 도망치려 한 경우도 많았다. 왜 내게 이런 심리적인 방어 기제가 생겼는지 살펴봐야겠지만 나는 스스로 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인 것 같다.

누군가, 특히 내게 애정 있었던 사람이 나로 인해서 실망하게 되고 그 마음이 떠날까 봐 차라리 아예 시작을 안 하게 되는, 두려움이 내게 늘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에서도 최선보다는 차선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의 인복이 되어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


인간관계를 맺고 가꾸어 나가는데 서툰 나이지만 나도 인간관계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누군가의 희망이 되어주는 것. 누군가의 든든한 빽이 되어주는 것. 누군가의 인복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성공하여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다면 나의 후배들에게 든든한 우산이 되어줄 수 있다.

몇몇의 선배님들이 제안한 것처럼 나도 후배들에게 이번 채용에 지원해서 같이 일하자고 제안도 할 수 있다.

내가 성공적인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면 후배들에게 우리 회사로 와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할 수도 있다.


내게는 정치를 하는 시누이가 있다.

시어머니는 항상 그녀가 변변치 않는 집안에서 큰 배경 없이 혼자 정치를 하느라 얼마나 힘들겠냐고 안쓰러워하신다.

내가 사업을 하게 되면 나는 그녀를 후원하는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앞으로 크게 될 정치가를 후원하는 여성 사업가가 내 꿈이었다.


과거형으로만 단정 지을 수 없는 꿈이기는 하지만, 사십 대 중반의 내가 아직 일개 사원으로 머물러 있으니 어느 정도는 실패한 꿈이라고 봐야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기에 더더욱 내가 힘을 내서 이루고 싶은 꿈이기도 하다. 


아끼던 후배가 이직을 한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축하를 해주었다. '담에 나랑 또 같이 일하자! 내가 너 데려갈게.'라는 막연한 빈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내가 어디 좀 더 영향력 있는 자리를 가야만 그녀를 데리고 갈 수 있을 텐데.. 요새 드는 생각은 자꾸만 여기가 나의 커리어 마지막일 것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내가 바라는 그 누구의 인복도 되어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마감하지 않기를, 내가 길을 찾아내기를, 

나 또한 누군가의 인복이 되어줄 수 있기를 정말이지 간절하게 바란다.

그러려면 내가 행동을 해야겠지. 굳은 결심으로 최선을 다해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야겠지.

바라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오늘의 글은 어제 그 전화를 끊고 나서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쓰려고 시작한 글인데, 내용이 좀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자기 고백적인 글이면서도 한없이 부정적이고 못난 치부를 드러낸듯한.. 스스로 인복을 만들지도 못하고 들어오는 인복도 차 버리는 사람이 쓴, 분노 가득한 열등한 글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또한 나이니까.. 기록으로 남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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