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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슬 스커트 Jul 15. 2021

설익은 충고는 배탈을 부른다

니가 나를 알아?


나는 때때로 살면서 참 자신이 없을 때가 많다.

무엇인가 더 열심히 하려고 하고 알아갈수록 이상하게도 자신감은 떨어졌다.

이를 악물고 시작한 첫 번째 책 쓰기도, 어떤 시인의 시구처럼 '쓰면 쓸수록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려' 책이 출간된 이후에 한 번도 제대로 펼쳐서 끝까지 읽어내지를 못했다.


나는 내가 무엇인가를 잘 안다고 확신하고 깊이 팔수록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갔고, 무언가를 알아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지식, 어떤 현상을 다 안다고 자신하는 것은 어쩌면 정말 많은 부분에서 자만 일지 모른다.


학문이나 일처럼 '팩트'로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사실 팩트와 함께 통찰이 있어야 안다고 표현할 수 있으며, 그것도 꽤나 깊이 있게 관심을 가지고 그 주제를 지속적으로 들여다보고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잘 안다. 전문가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하물며 한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그와 함께 24시간을 함께하지 않는 이상, 그의 인생 전체를 똑같이 공유하지 않은 이상, 아니 그가 되어보지 않은 이상 어떻게 쉽게 판단하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대화를 할 때 사실 충고만큼 어렵고 까다로운 대화법이 있을까 싶다.

충고는 '충성스럽게 고하는' 단어의 한자적 의미만큼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하고 듣는 사람에게 진짜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굉장히 쉽지 않은 대화이고 신중하게 해야 하는 말이다.


충고를 참 쉽게도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충고'하니 전 직장에서 마지막에 함께 일했던 어떤 동료가 생각났다.


그는 들어주기보다 본인의 생각을 말하기를 참 좋아했는데, 그가 하는 얘기들이 '충고'처럼 들렸던 이유는 그저 본인의 생각을 말한다기보다 듣는 사람의 행동을 평가하고 교정을 담고 있는 말을 단언하듯 했기 때문에 그것이 충고처럼 들렸던 것 같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서 불쑥 '그래, 네가 얼마나 잘나서 나한테 이렇게 얘기하는 건데?' '니가 나를 알아?'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충동을 느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충고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충고'란 마치 선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아주 좋은 것으로 포장되어 있고, 충고를 못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만큼 생각이 닫혀있고 그릇이 작다고 살아오면서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진짜 그럴까?



충고, 꼭 들어야 해? 꼭 해야 해?


'충고'는 사실 불편한 말이다. 옳은 얘기처럼 들리지만 듣고 있으면 기분이 편하지는 않다. 

우리는 학교를 다니면서 '충고'를 잘 받아들이고 스스로 잘못된 것을 반성하고 고치는 마음자세를 가지도록 교육받는다. 직장에서도 평가 시즌에 평가자로부터 정량적인 평가 외에 이러저러한 정성적인 평가와 '충고'를 함께 받는다. 평가자가 충고를 하는 이유는 '잘못했으니 고치라'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그 '충고'라는 것을 꼭 받아 들어야 할까? 

정말 '충고'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나은 인간이라서 그런 것일까?


'충고'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거부감이 드는 충고'와 '가슴에 새기게 되는 충고'가 그것이다.

그리고 '가슴에 새기게 되는 충고'에는 두 가지가 담겨 있다. 

경험과 통찰이다. 


나보다 세상을 먼저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경험에서 나온 통찰이 담긴 '충고'를 들을 때면 내 마음속 '중2병 반항아'도 고개를 숙이고 끄덕인다. 이렇게 마음을 무릎 꿇게 만드는 충고는 경험과 통찰에서부터 나온다. 그가 나를 진짜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살아온 시간들 안에 나와 비슷한 상황들이 있었고, 그가 그것을 어떻게든 지나왔기 때문에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의 충고는 가슴 깊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참 그런 충고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왜냐하면 각자의 경험이 다르고 나의 상황이 온전하게 안되어 봤기 때문에 내 마음을 울리고 움직일 수 있는 상대방의 말은 많지 않다. 진심 어린 '충고'는 나를 많이 관찰하고 알아야 가능한 것인데, 실제 그런 사람이 내 곁에 몇이나 될까. 



그만하라고 했으면 어색해졌겠지?


다시 전 직장의 '충고 쟁이'가 있던 시간으로 돌아가 보겠다.

설익은 충고로 거부감을 주었던 그에게 


'OOO님, 그렇게 '충고'하시는 거 그만하시죠? 별로 도움도 안 되고 무엇보다 듣기가 불편해서 OOO과 대화하는 게 유쾌하지 않네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말을 했으면 어땠을까?



나는 '충고'를 해주었던 사람에게 그만하라고 말했던 경험이 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충고해주었던 사람과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나의 반응에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다.


'충고'를 하는 사람들은 나름 본인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대화가 의미 있다고 느낀다. 또한 본인은 상대방을 배려하고 아끼기 때문에, 잘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한다. 즉 '선의의 따끔함'정도라도 스스로 생각하겠지. 그리고 때로 어떤 사람은 자기가 말하는 게 '충고'라고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듣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지 않고 말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내심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거나 말을 하면 영락없이 듣는 사람을 속 좁은 나쁜 인간으로 몰아가며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틀어져 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설익은 충고'를 거부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

'충고'를 그만하라는 말에 어색해질 사이는 '충고'를 듣는 동안에도 충분히 어색한 사이일 것이다.

그 어색함과 불편함을 나 혼자 감당하고 계속 '충고'를 들어주느냐, 아니면 어색하고 불편한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알려서 함께 서먹해지는 감정을 공유하느냐의 차이이다.


사람들은 불편한 말을 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원만하게 사람들이랑 둥글둥글 잘 지내는 게 좋은 거라고 사회로부터 익혀왔기 때문에 불편해지는 말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충고' 그만하라고 말했던 사람과 멀어진 이후, 내 마음도 몹시 불편했고 내내 '내가 그때 그냥 놔둘걸 그랬나..'하고 후회도 좀 했었다.


지나고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그런 사이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관계일 뿐이다.

후회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화나는 마음 등 부정적인 마음은 엄청난 나의 내적 에너지를 소비시킨다. 

긍정하고 행복한 생각만 하는 데 사용할 심적 배터리도 다 충전하지 못했는데 부정적인 생각이 내 마음을 잠식하게 둘 수는 없다. 

신뢰를 회복할 수 없는 관계에 내가 마음을 계속 쓰고 의식하는 것은 낭비다. 

스쳐 지나가는 관계까지 일일이 마음이 담아둘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인생에서 내 곁에 오래 끝까지 남아있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되기 때문이다.



'설익은 충고'는 배탈을 부른다.


여름이라 차가운 음료를 많이 마시게 되는데 살짝 배탈이 오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어려서 배탈이 나면 엄마는 과일도 먹지 말라고 하셨다.

익히지 않은 음식들은 뒤집어진 속을 더더욱 악화시킨다.

이처럼 '설익은 충고'는 되려 배탈을 부른다.


정말 잘하지 못할 것 같으면 하지 않아야 하는 게 '충고'인 것 같다.



내가 알아서 할게.


'충고'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는 듣는 사람으로부터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답을 들을 때이다. 물론 이런 반응은 가까운 사람 사이에만 가능한 '충고가 불편했다, 너의 충고가 선을 넘었다'라는 가장 솔직한 답변일 것이다.

사회생활하면서도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선 넘은 충고들이 넘쳐난다.


딱히 친하지는 않지만 직장 동료에게서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상대방의 기분은 어떨까?

'쳇, 기껏 생각해서 얘기해줬더니 반응이 뭐야, 혼자 잘났다는 건가?'


분명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당신이 '생각해서 얘기해줬다는' 그 확신의 근거는 과연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가?

당신 안에서 나온 것이다. 상대방이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은 그냥 내 착각이고 내 자만이다.



미드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


내가 자주 보던, 병원에서 연애하던 미드에서는 주로 주인공이 행동 변화를 일으키거나 어떤 결심을 할 때 동료 의사나 환자 등 주변 사람들의 말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작가는 아마도 이러한 주변인의 말 몇 마디가 이미 그 사람 안에 있었지만 자각하지 못했던 어떤 생각을 끄집어내어 행동하게 만드는 trigger역할을 한다는 걸 보여주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일은 사실 잘 일어나지 않는다.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낼 만큼 영향력 있는 충고가 참 쉽지 않기 때문이다.



충고보다 우선인 것은 지켜보기, 들어주기, 응원해주기


많은 경우 사람들은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진지한 1인이다.

나만큼 내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도 없다.

내가 나를 아끼고 생각하는 만큼, 상대방도 본인을 가장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괴로운 문제가 있을 때 누구보다 고민하고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것도 본인이다. 


누군가 어리석은 생각이나 선택을 한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참견하고 싶고 '충고'하고 싶어 진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또 그때의 최선일 수도 있다.

나 외에 다른 누구의 판단이나 결정도 우리는 쉽게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의외로 당신의 열정적인 '충고'가 영향력이 없을 수도 있다.


사람은 생각보다 자기 안에 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설령 그 답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자기 결정권을 발휘해서 스스로가 선택한 답으로 문제를 풀어갈 때 후회라는 감정이 덜 남게 된다.


나를 들여다보던 소견으로 상대방에게 설익은 충고를 하기보다 그 사람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지켜봐 주고 들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훨씬 큰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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