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일기] 명절이라는 이름의 진공청소기

by 편알못가이드

달력에 붉게 칠해진 날들이 지나가고, 세상은 다시 익숙한 무채색의 궤도로 복귀했다. 설 명절이 끝난 것이다.


명절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올 때, 편의점이라는 배는 상권에 따라 극명하게 다른 운명을 맞이한다. 빌딩 숲이나 공단에 자리 잡은 점포들이 깊은 동면에 빠져드는 동안, 주택가 한가운데 닻을 내린 점포들은 일 년 중 가장 격렬한 전투, 이른바 '대목'을 치러야 한다. 20년의 세월 동안 스무 개가 넘는 점포를 거쳐오는 동안, 나의 전장은 대부분 후자였다.


이 시기가 오면 나는 일종의 농성전을 준비하는 장수처럼 물건을 비축한다. 평소라면 여유 있게 발주할 상품들을 두세 박스씩 창고에 쟁여두고, 담배 역시 요새의 벽돌처럼 단단히 쌓아 올린다. 이것은 꽤나 불합리한 시스템이다. 전방의 초소인 우리는 알바생의 시급에 휴일 수당이라는 웃돈을 얹어가며 24시간 불을 밝혀야 하지만, 우리에게 물자를 보급해 주는 후방의 센터는 3일 동안 태평하게 셔터를 내려버리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휴식이 우리를 빗겨가는 듯한 억울함이 밀려오지만, '대목'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중력에 이끌려 우리는 기꺼이 불침번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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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의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묘한 해방감이 서려 있다.


세뱃돈이라는 뜻밖의 자본을 손에 쥔 꼬마들은 평소 선망하던 장난감이나 간식을 향해 망설임 없이 돌진한다. 오랜만에 가족이라는 복잡한 거미줄 속에 얽혔다가 풀려난 어른들은, 이미 적당히 알코올에 절여진 상태로 더 독한 술을 찾아 비틀거리며 들어온다. 명절이 주는 일탈의 공기 탓일까. 평소라면 가격표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을 비싼 건오징어나, 굳이 손을 뻗지 않았을 양주병 앞에서도 사람들의 지갑은 마법처럼 쉽게 열린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장사를 하는 입장이란 참으로 얄궂어서, 나는 그들의 느슨해진 씀씀이를 은근히 응원하게 된다.


연휴가 끝나고 출근한 오늘, 매장은 마치 한바탕 거대한 진공청소기가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평소에는 진열대 구석에서 침묵을 지키던 1.5리터짜리 대형 콜라와 밀키스, 환타 페트병들은 자취를 감췄다. 소주와 맥주, 막걸리는 말할 것도 없고, 고가의 안주류와 두둑하게 쌓아두었던 담배들마저 썰물 빠지듯 매대를 빠져나갔다. 이빨이 빠진 듯 군데군데 비어버린 휑한 진열대를 바라보며, 나는 조금 막막해졌다. 이것들을 다시 원래의 질서대로 채워 넣으려면 나와 알바생들은 꽤나 고단한 육체노동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묵묵히 카운터로 걸어가 금고를 열었다. 그곳에는 지난 며칠간의 소란스러움과 피로를 정확하게 보상해 주는 묵직한 현금 다발이 고요히 누워 있었다. 지폐를 세는 손끝으로 기분 좋은 온기가 전해졌다. 그래, 이 맛에 그 지독한 명절의 피로를 견디는 것이다.


오늘 밤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꽤나 가벼울 것 같다. 매일매일이 텅 빈 진열대와 무거운 금고를 마주하는 명절만 같기를, 나는 속물적이지만 아주 솔직한 기도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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