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이자 조력자, 그리고 불안한 보호자였던
원래 이번 글에서는 2회기 상담 중 성격기질 검사를 다룰 예정이었는데 주제가 바뀌었다. 글이 수정된 계기는 어젯밤 있었던 a와의 다툼이다. 글은 과거를 따라가지만 나는 현재를 살아가고, 상담 후 인간관계를 조정하며 생기는 잡음들은 일상의 하모니를 불쑥불쑥 흐트러뜨리고 있다. 특히 a와의 갈등은 이 글을 연재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나는 지금 미쳐가고 있어'와 '이제야 내 마음을 알아가고 있어'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보고싶어, 페리도트!)
처음 a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나와 a의 이력을 들은 상담사는 말했다. '곤란하네요.'
나: 왜요?
상담사: 형제 싸움을 붙이게 될 것 같아서요.
나는 속으로 웃었다. 당신 때문에 내가 a와 싸운다고? 흥, 웃기는 소리.
다시 현재로 돌아와, 나는 그의 말 때문에 a와 싸우지는 않는다. 대신 내 말과 생각으로 박 터지게 싸우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어리둥절할 당신을 위해 어제의 따끈따끈한 사례를 보여주겠다.
당신이 이 글을 보면 알다시피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됐다. 하지만 그 소식을 a에게 못 전하고 있다. 그의 반응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축하 받고 싶은 마음이 커서 발행하지 않은 다른 습작을 보여주며 넌지시 작가 신청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떠보았다. 그러자 즉시 놀란 반응이 돌아왔다.
A: 작가 하려고? ....다른 플랫폼도 찾아보지.
거기까진 괜찮았는데 뒷말에서 화가 나 버렸다.
A: 내가 연재하는 거 보고 따라하는 거 아냐?
난 내가 너보다 먼저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알았으며, 앞서 두 번 작가 신청을 했다고 반박했다. 애초에 19년 전부터 나는 아마추어 소설가였다고, 글은 내 영역이야! 그러다 언쟁이 과열될 즘 전제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내가 왜 브런치 작가 활동을 a로부터 쟁취해야 하는 일처럼 말하고 있지?'
이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오랜 불가침조약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쌍둥이는 비슷하게 생겼다. 그리고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예전부터 사람들은 틀린그림찾기 하듯 우리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인격체를 대하는 태도로 무례하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종종, 아니 꽤 자주 우리를 경쟁 붙이려 했다.
'a는 수학을 잘하는데 너는 걔보다 못하는구나.'
'너는 글을 잘 쓰는데 a는 너보다 못하는구나.'
이런 일이 반복되자 우리는 아이덴티티의 영역을 나누게 되었다. 옷을 선택할 때 나는 파란색, a는 빨간색. 가방을 선택할 때 나는 남아용 가방, 걔는 여아용 가방. 소위 '남성적'인 특성은 내가 가져가고 '여성적'인 특성은 a가 가져갔다. 본의 아니게 서로를 공격하는 꼴이 되지 않도록. 선택이 겹치면 경쟁하게 되고, 구경꾼들이 떠나고 난 뒤에는 만신창이가 된 우리 둘만 남았으니까. 아이들을 경주마처럼 품평하는 주변 어른들에게 엿을 날리기에 우리는 너무 어렸다.
주 양육자였던 엄마가 '쌍둥이 자녀들이 각자의 개성을 갖고 성장하는 구도'를 내심 바라기도 했다. 이런 환경이 작용하여 우리는 암묵적으로 상호이익을 위한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문제는 그 체결 회장이 무의식이었기에 우리 둘 다 도장을 찍은 걸 몰랐다.
내가 무의식중에 남성성을 택한 건 a가 사회가 여아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원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a는 나보다 더 주위 시선에 예민했다. 인정욕구도 강했다.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는 갖고 싶은데 가족 안에서 '좋은 언니' 역할도 수행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걔 머릿속에서 이상적인 언니는 동생의 부족한 면을 훈도해 채워주는 존재였다. 교사였던 엄마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개성을 지키고 싶은 욕구와 언니로 인정 받고 싶은 욕구가 충돌하며 패턴이 꼬이게 되는데, 이런 식이다. 본인의 행동이 전적으로 옳다고 믿고 나에게 자기가 하는 걸 시켰다. 내가 따라해서 더 잘하면 자기 몫의 칭찬을 빼앗긴 사람처럼 언짢아졌다. 반대로 내가 못해서 풀이 죽으면 날 상처준 느낌을 못 견뎌 했다. 그는 대체로 좋은 친구였지만 보호자로는 영 좋지 못했다. 사실 그건 당연했다. a는 나와 동갑이었기 때문이다.
넌 내가 너보다 뛰어난 건 못 견디면서, 너와 비교해서 우울해하는 것도 못 견뎠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야.
어제 a와 싸우던 중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스스로 말했는데도 내가 듣고 놀랐다. 진실이 예리한 칼처럼 가슴을 긋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내가 저항했다면 이 환장 파티는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적성검사에서 보이듯 나는 싸움을 좋아하는 기질이 아니었다. 혼란 속에서 내가 택한 전략은 속내를 숨기는 것이었다. 표정을 감춘다는 티도 내지 않으며 a가 무슨 반응을 보여도 덤덤한 척했다. 결국 나조차 내가 둔하고 무던한 사람이라 믿게 되었다. 그토록 스트레스가 심해 신체화까지 나타났음에도 나 자신을 '대범하다'고 믿었던 인지부조화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더불어 a가 나보다 현명하다고 믿음으로써 그가 나를 휘두르는 상황을 정당화했다. 내 머릿속에서 a는 '언니'가 아닌 '친구'로 세팅되어 있었기에 그런 믿음 없이는 버티기 어려웠다. 실제로 겉으로 드러난 결과는 그게 맞는 것 같았다. a가 본인이 가는 길로만 나를 잡아끌었기에 그가 앞서는 것처럼 보이는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삶은 외줄기 길이 아닌 광야라는 사실을 알기에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학생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한국 공교육은 인생의 넓음을 알려주기는커녕 우월-열등 이분법 논리를 강화했다. 그렇게 나는 우리 관계에서 못미덥고 어리숙한 존재로 굳어졌다.
이 때문에 '또래친구'의 개념도 혼란스러워져서, 나와 친해진 사람의 비위를 맞춰야만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돌이켜보면 어떨 때 내 태도는 비굴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절 겪었던 따돌림에는 분명 그 영향이 있으리라. 가해자들은 저항하지 못할 상대를 골라 공격하니까.(다시 말하지만 피해자의 특성은 가해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런고로, 5화에 등장한 학교 폭력의 이면에는 이 엄청난 연쇄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이걸 알아차린 요즘 내 감정은 애정과 애증을 오락가락하고 있다. a는 내가 힘들어 보일 때마다 도움을 주려 하는데, 하필 그 방식이 '자기 경험이 옳은 양 충고하는 것'이라 분노에 기름만 붓는다. 몇 번이나 싸웠고 걔는 내 상담사가 싫다는 소리까지 했다. 그걸 듣고 결국 뚜껑이 열려서 소리쳤다. '넌 이 와중에 상담사를 신경 써? 내가 상담사 아바타인 줄 알아? 너한테 지금 화 내는 건 나라고!'
무척 화가 나고 속상하다. 그래도 a에게 그 감정을 숨김없이 전한다. 아직까지는 a와 소통이 되고 있다. 그가 과거 본인의 잘못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도 알고 있다. 그 역시 어린아이였다는 걸. 또래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터무니없고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린 아이였다는 걸 말이다. 관계에서 파생된 정신병리학적 문제가 대부분 그렇듯, a가 나쁜 게 아니라 환경 탓이 컸다.
다자녀 가정의 아이는 부모로부터 사랑 받아 생존하기 위해 자신만의 셀링포인트를 만든다. 그걸 어필하기 위한 여러 전략을 세운다. a가 택한 건 부재가 길었던 맞벌이 부모님의 역할을 대신해 쓰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생존방식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나와 그의 공존을 도모했다. 어린 내가 선택한 생존방식이었다. 문득 뒤틀린 곳이 아려올 때면 유년기가 억울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살렸다. 그러니 이제 어른이 된 내가 불필요해진 상호협약서를 수정하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 a가 도장을 찍어주면 좋겠지만, 거부하더라도 변경된 조약을 실행 해볼 것이다. 나에게 필요하니까.
이건 비밀인데, 상담사는 내가 잘 헤쳐갈 거라 말해주었다. 내향성은 있지만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한다. 진작 a를 잡아 당겼으면 저쪽이 끌려왔을 텐데, 내 공감능력과 정서 감수성이 높아 스스로 억제하고 있었던 거라고 말이다. 무거운 철갑 옷을 입고 수련해온 무림고수가 된 기분이다.
아직 혼자는 외롭지만 자유는 유혹적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 자신의 보호자가 되는 연습을 한다.
※보너스 페이지
쌍둥이의 보호자인 분께 드리는 주관적인 부탁
(부제: 내가 어렸을 때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1. 두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세요.
그들이 다른 선택을 할 때는 '쌍둥이인데도', 같은 선택을 할 때는 '역시 쌍둥이라서'라고 여기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고유성을 확립해나가는 아이들에게는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똑같이 딸기맛을 선택했더라도 한 명은 색이 예뻐서, 한 명은 초코맛이 없어서 차선책으로 택한 걸 수 있어요. 그들의 선택 자체보다는 왜 그걸 선택했는지에 관심을 보여주세요. 왜냐고 질문해도 좋아요. 그러면 그들은 자기 마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 나는 이래서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라고 알아갈 수 있어요. 그러면 다음 선택에 더 자신감이 붙게 돼요.
2. 두 사람이 상호작용하며 관계를 정립해나가는 걸 한 발 뒤에서 지켜봐주세요.
보호자는 쌍둥이가 서로 친구처럼 지내기를 희망할 수 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정해진 서열이 없기에 오히려 극심한 혼란 속에서 경쟁하고 있을지 몰라요. (입사 동기와 정규직 자리를 두고 평가 받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설상가상으로 인사팀에서 24시간 지켜보고 있는 거죠.) 두 사람은 주먹질을 할 수도 있고, 욕을 할 수도 있어요. 이때 보호자가 '사이좋게 지내야지'라고 억지로 붙여두려 하면, 두 사람은 버려질까봐 겁이 나서 겉으로만 잘 지내며 속으로는 억압된 서열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감정을 각각 존중해주세요. 그리고 '괜찮다. 언제나 나는 널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안정된 마음을 지닌 사람은 곁의 사람에게 너그러워집니다. 보호자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하면 그들은 마음 놓고 서로 교류하며 거리를 조정할 거예요.
3. 두 사람의 마음을 직접 물어봐주세요.
위 두 가지는 제가 어린시절에 바랐던 것들입니다. 자녀분들께는 저와는 다른 희망사항이 있을 거예요. 옆에 다가가 넌지시 '쌍둥이인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는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주세요. 자녀분들의 대답에 귀기울여주세요. 모쪼록 자녀분들이 훗날 돌이켜볼 때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어린 시절을 보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