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금요일과 최악의 토요일

하늘에서 난데없이 조명이 떨어졌다

by 비탈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두 번째 상담을 마친 주말, 나는 버스에 앉아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깊고 무겁고 어둡고 혼란스러웠다. 간만에 보는 마포대교의 야경이 내 안의 감정으로 끈적끈적 뒤덮여 우중충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생활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왜 나는 이토록 불행해진 걸까. 상담은 행복해지기 위해 받는 거 아니었어?




고전영화 <트루먼 쇼> 이렇게 시작된다. 평범하게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던 트루먼은 어느 날 하늘에서 조명이 떨어지는 걸 목격한다. 거기서 그는 위화감을 감지하고, 본인 삶에 얽힌 비밀을 풀어나간다. 그 주 토요일에 나는 트루먼의 혼란을 몸소 체험했다.


전날, 그러니까 금요일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최고의 하루였다. 나는 번잡하고 화려하며 놀 게 많은 서울에서 엄마와 단둘이 재미나게 시간을 보냈다. 이모가 꿰메준 신상 치마를 입고 다니며 '이거 어디서 산 거냐'는 수줍고 친절한 질문을 받았고, 식단조절을 하느라 못 먹었던 달콤한 커피와 케이크를 양껏 먹었다. 2회기 상담 이후로 머릿속에 흐물거리는 젤리처럼 엉겨있던 불안은 청량한 봄햇살 아래 휘발되어 날아갔다. 그래, 이게 사는 거지! 뭐가 문제겠어.


그런데 주말에 a가 나들이에 합류하면서 뭔가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 뭔가가 틀어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인생에서 엄마, 나, a 셋만 있었던 시간을 다 합치면 내 삶의 2/3는 될 것이다. 그 시간동안 나는 한 번도 불행했던 적이 없었다. a는 언제나 의지가 되었고 엄마는 막내인 나를 귀여워했다. 그렇기에 그 주 토요일은 더욱 기이한 위화감을 남겼다.


그날 내 머리 위로 떨어진 조명은 이 말이었다.

A: 그러게 내가 찾은 경로로 갔으면 좋았잖아. 네가 괜히 말해서 시간만 버리고.


연극을 보기 위해 충정로 역으로 가던 중이었다. 지하철보다 버스를 선호하는 나는 버스로만 가는 노선을 골랐고, a는 버스에서 지하철로 갈아타는 노선을 골랐다. 내가 찾은 노선을 얘기하자 a는 급히 버스벨을 눌렀고 우리는 하차했다. 그런데 그 다음 버스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앉기는커녕 입구까지 꽉 차서 버스 기사분과 나란히 서야 할 정도였다.


'주말이라 그런가보다.' 그렇게 납득하며 창밖으로 지나가는 한강의 눈부신 윤슬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a가 쏘아붙이듯 내게 말한 것이다. 나는 그의 사나운 표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에는 익숙한데 마음에는 익숙치 않은, 설명할 수 없는 괴리감이 들었다.


평소라면 내가 했을 행동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어쩔 줄 모르며 사과한다. 엄마에게도 어리광 섞인 미안함을 표한다. 그 다음 a의 수습에 순순히 따른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함부로 대해지고 있다는 경각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입 밖에 내보았다.

나: 이럴 줄 몰랐어. 솔직히 너도 몰랐잖아. 버스가 이렇게 붐빌 줄은.


그러자 a는 당황한 표정이 되더니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a: 왜 언성을 높여? 여기서는 사람 많으니까 나가서 얘기해.


난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불편을 표현하기 위해 말끝에 힘을 주고 인상을 썼을 뿐이었다. 그걸 a는 과대 해석했고, 나아가 내 반응을 몰상식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걸 자각하자 당황스러움이 밀려들었다. 나를 매도하는 a에 대한 감정인지, 평소같은 상황에서 답지 않게 구는 나에 대한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원래도 자그맣게 올라와 있던 불쾌감이라는 불씨가 휘발유를 만난 듯, 당혹감 위로 번지며 분노라는 불길을 일으켰다.


버스에서 내린 후 지하철로 걸어가며 나는 a와 냉전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또 한 가지 거슬리는 점을 발견했다. 엄마가 우리 둘 중 a에게만 이해를 구하려 한다는 점이었다.

엄마: 얘가 버스가 만원이라 얼마나 속상했겠어. 네가 이해해줘야지.


평소였다면 엄마가 내 편이라고 으쓱했을 텐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성긴 그물 같은 불편함이 날 옭아맸다. 버스가 만원인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걸 a가 다그쳐서 내가 받아친 건데, 엄마는 왜 '속상해서'라고 포장할까? 저렇게 말하면 내가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 같잖아.


그런 식으로 뻗기 시작한 생각의 줄기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었다.


왜 어제는 날 믿었던 엄마가 오늘은 a의 말만 듣지?
왜 a가 나와 엄마의 스케줄을 쥐고 있는 것처럼 굴지?
왜 나는 a의 결정에 이의 없이 따르고 있지?


그러자 별 것 아닌 말 하나, 행동 하나까지 모조리 거슬리기 시작했다. a와 엄마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내 머리만 터질 것 같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평소의 나로 있으려 했지만 웃고 떠들수록 점점 힘들어졌다. 믿을 수 없게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맞는 봄볕 아래서 나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불타버릴 만큼의 히트!(지금은 농담하지만 그땐 정말 우울했다)


그러다 피할 수 없는 히트의 순간이 왔다.


연극을 보고 충정로 4번 출구 쪽 공원으로 나오던 중, 우리는 심리치료 대학 동아리 캠페인을 보았다. 그들은 직접 만들었다는 방어기제 테스트 링크를 주며 우리 셋의 옷차림을 칭찬했다. 그 말이 유독 반가웠다. 누가 봐도 나와 세트인 치마를 입고 서 있는 a와 엄마가 든든한 아군 같았다. 내적으로 불안했기에 외적으로 가족에게 사랑 받는 사람처럼 보이는 게 좋았다.


그때 a가 무심히 내 옆을 이탈해 어딘가로 향했다. 그 뒤를 엄마는 한 치 망설임 없이 따라갔다. 순식간에 혼자 남은 나는 이제 막 끝낸 테스트를 쥔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뒷모습이 익숙했고, 그 익숙함을 자각하는 건 낯설었다. 이토록 큰 소외감을 지금껏 몰랐다는 게 너무나 아팠다. 기계적으로 버튼을 눌러 방어기제 테스트의 결과를 보았다. '위험 수준'이 빨갛게 떠 있었다. 계시라도 받은 듯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엄마는 나와 a의 의견이 엇갈릴 때 a를 무조건 지지했다. 그리고 a는 통제해야 할 미숙한 인간으로 대했다. 당시 떠오른 날 것 그대로의 표현을 옮기자면, 두 사람에게 나는 반려동물 같은 존재였다.


애정은 있지만 존중은 없다. 이토록 불균형한 관계를 어떻게 몰랐는지, 그 이유가 내 손 안에 있었다. 내가 날 놓았다. 회피했고 침묵시켰고 부정적인 감정을 부정했다. 그런 생각이 밀려들자 속이 쓰리고 화가 났다. 한편으로는 겁이 나기도 했다. 이러다간 내가 외출을 망쳐버릴 것 같았다. 그러면 엄마와 a가 나에 대한 평가를 더욱 낮출 터였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고, a는 인강을 듣기 위해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와 둘만 남자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알아차린 걸 어떻게 알려야 할지 속이 복잡했다. 아니, 애초에 내가 느낀 게 맞을까? 오늘따라 예민했던 건 아니고? 이걸 고치려면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는 거지?


처음 헬스를 할 때를 떠올려보자. 아예 근육이 없는 부위를 움직이려 하면 어떻게 힘을 줘야 하는지 감이 오질 않는다. 그때의 내 상태가 그랬다. 느껴본 적도 없는 감정을 표현하려다보니, '엄마와 a 자체가 문제'라는 식으로 파국을 맞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 회피성 인간은 그다운 결정을 내린다. 그냥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잊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결정은 현명한 듯 보였다. 식사 후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 나는 '피곤해서 그랬던 거야' 정도로 느긋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저녁 버스에 좌석이 적어서 엄마와 떨어진 자리에 앉아, 낮에 보지 못했던 한강을 구경하며 고단한 하루를 끝내려 했다.


하지만 내 인생을 담당한 시나리오 감독은 날 어떻게든 다른 방향으로 몰아가고 싶었나 보다. 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 이 정도로는 부족했나보네. 전화 시퀀스 하나 추가하죠.'


그렇다. 그때 a의 전화가 왔다. 저녁으로는 뭘 먹었는지, 둘이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물은 a는 대뜸 말했다.

a: 난 오늘 최악의 하루였어. 앞으로는 일정에 좀 신경 써줘.


순간 머리 뚜껑이 덜그럭거렸다. 나답지 않은 반문이 튀어나왔다.

나: 왜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하는 거야? 엄마랑 같이 있을 때는 너도 기분 좋아보였는데.


a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a: 엄마 앞에서 그런 소리를 어떻게 해.


그 순간 마음의 압력이 확 높아지면서 뚜껑이 날아갔다. 버스 안이었기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로 으르렁거렸다. a에게 이토록 화가 난 건 사회인이 된 이래로 처음이었다.

나: 엄마한테 못할 말을 나한테는 해도 돼? 나도 오늘 네 일정 맞추느라 힘들었어. 그래도 최악의 하루였다고는 안 했잖아. 근데 지금 네 말 때문에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수화기 너머로 침묵하던 a는 '알았다. 집에서 얘기하자'며 통화를 끊었다. 대화는 10분이 안 됐지만 나는 전화를 받기 전과 완전히 다른 기분이 되어 있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밤의 한강이 예뻐서 더 비참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집안에서 사랑받는 막내, 특별한 평생친구가 있던 나는 저 검은 물 아래로 가라앉아버린 것 같았다.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행복이 송두리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기 전과 달리, 그게 내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후 글에서 나오겠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자아분화'와 관련된 이슈가 있었다.


'자아분화'는 가족심리치료의 선구자 머레이 보웬(Murray Bowen)의 핵심개념이다. 자아분화를 간단히 설명하면, 타인에게 휩쓸리지 않고 고유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결정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그런데 한국은 분화가 잘 된 가족이 드물다고 한다. 아내와 남편, 자녀와 보호자, 형제자매가 서로 유착되어 있는데, 이 상태를 '융화되었다'고 표현한다.


앞선 경험을 예로 들자면 이렇다. 오늘 a는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엄마가 기분 좋았기에 불쾌감을 억눌렀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는 나에게 감정을 발산했다. 하지만 사실 가족이라 해서 감정이 동기화될 필요는 없다. 누군가가 우울한 날에 누군가는 행복할 수 있다. 그 개별성을 인정하고 상호작용해야 분화가 잘 된 가족이다. '착잡해 죽겠는데 뭐가 좋다고 웃어!'라는 소릴 듣는다면 웃고 있던 당신이 아니라 그렇게 야단치는 부모님이 반성해야 한다.


내 감정의 주인공은 나야


더불어 보웬은 '희생양 이론'을 정립했는데, 융화된 가족 내에서 약한 구성원이 희생양의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 희생양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문제아, 부모역, 친구역, 귀염둥이, 광대 등. 희생자는 이와 같은 역할을 강요당하며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는데 이용된다. 자아분화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아무튼 그때의 나는 비참하고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내가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문제를 자각해서만이 아니었다. 무의식이 대문자로 쾅쾅 못박아둔 원칙 때문이었다.


'그래도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무슨 뜻인고 하니, 트루먼쇼를 눈치 챘더라도 내 배역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엄마에게 서운함을 표현해선 안 된다. a의 권위에 도전해서도 안 된다. 그랬다간 지금의 안온한 관계는 유지되지 못할 거다. 트루먼은 쇼를 파토내고 찾아갈 첫사랑이라도 있었지, 내겐 여기가 현실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짜 하늘 아래서 산다면 나도 그 하늘 아래 머무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진정 소중한 관계라면, 내가 더 솔직해져도 관계는 유지된다. 심지어 더 건강한 방식으로,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물론 예전의 배역으로 돌아오라며 화를 내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 갈등이 생기면 속으로 이렇게 말해주려 한다.


In case I don't see ya.
Good morning, good after noon, good night.


벽 안의 세계여,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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