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다 엉망이에요

상담사: 잘 됐네요^^

by 비탈

반가운 소식이 있다. 우울한 이야기는 오늘을 기점으로 차츰 줄어들 예정이라는 것이다. 상담 3회기 이후 내가 내 안의 그림자를 조금씩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과 접촉하는 게 쉽진 않았다. 3회기는 무려 2시간 30분 마라톤으로 진행됐으니까.(주의※ 상담사의 일정이 비어 있고 제가 너무 오열해서 긴급 협의된 상황입니다. 상담은 1회기 50분으로 제한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당시 나는 이런 말을 반복했다.

나: 무서워요. 제가 저한테 복수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자꾸 소중한 관계를 무너뜨리려 해요.


이전 화에서 얘기했던 위화감은 전조에 불과했다. 그걸 인식한 뒤로 나는 평소 인격을 유지하기가 힘든 순간들이 자꾸만 생겨났다. 특히 a에 대한 감정은 너무 험악해져서 두려울 정도였다. a는 처음엔 상담 초기의 혼란으로 받아들이며 인내했지만, 점차 태도가 공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상담을 받으면 자아가 통합되어야 하는데 넌 그냥 분열만 되는 것 같아.


상담 전날 a가 나와 싸우던 중에 한 말이다. 나는 그 에 상처 받았다. 그가 날 함부로 평가한 것도 상처였지만, '상담을 잘못 받아서 스스로를 망치고 있다'는 비난조가 느껴졌던 탓이다. 외부의 평가를 흘려넘기기에는 내가 아직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쌓이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a에 대한 반발심과 그걸 어리석음으로 치부하는 자기불신이 뒤엉켰는데, 그 혼란 자체가 '자율성이 부족한 인간'이라는 증명 같아 괴로웠다.


그러던 차에 진행한 문장완성 검사는 내 기분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문장완성 검사는 간단하다. 문장 앞부분을 읽고 뒷부분에 있는 빈칸을 채워넣으면 된다. 되도록 빨리, 즉시 떠오르는 답을 적는 게 핵심이다. 검사의 결과는 점수나 수치로 환산되지 않기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내게도 와닿는 것들이 있었다.



나의 장래는 어둡다.

내가 보는 나의 앞날은 별 의미 없다.

내가 늙으면 지금보다 평온해질 것이다.



검사지에는 내가 나라고 믿어온, 밝고 긍정적이며 발전 지향적인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음울하고 불신에 찬 목소리들이 줄지어 이어질 뿐이었다. 이제껏 실컷 이용해온 '나'에 대한 뒤늦은 영수증처럼.


← 무의식이 내게 전하려던 문제점 / 내가 전달 받은 것→


이런 연이은 충격으로 인해 3회기는 혼란의 카오스였다. 지금껏 믿어온 가족과 자신이 가짜 같다고 털어놓던 나는 시작한지 5분만에 눈물이 터져버렸다.

나: 어떡해야 해요? 지금 모습을 더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싶어서 상담을 시작한 거란 말이에요.....근데 원했던 방향과 반대로 끌려가요. 저를 통제할 수가 없어요.....


긴 시간동안 무슨 말을 했는지 전부 생각나진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하는 비유가 있다. '벽장 속 인형'이다.

나: 저는 만나는 사람에 맞춰 새로운 저를 만들어왔어요. 제 마음은 그런 제가 가득 쌓여 있는 벽장 같아요. 전 그 인형들을 아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벽장 구석에 내가 만든 적도 없는 인형이 들어앉아 있는 거다. 그날부터 하룻밤이 지날 때마다 인형들이 부서져 간다. 어떤 건 목이 꺾여 있고, 어떤 건 팔이 부러져 있고. 그러면서 정체불명의 인형은 벽장 앞에 서 있는 나를 향해 다가온다. 공포영화의 클리셰처럼.


당시 떠올린 나의 내면


상담사는 내 비유를 듣더니 물어왔다.

상담사: 뭐가 가장 무서워요?


소설을 써온 시간이 있어서일까. 떠올릴 수 있는 최악의 공포는 진부한 결말의 탈을 쓰고 흘러나왔다.

나: 그게 벽장 밖으로 나와서 제 자리를 뺏는 거요.


그 저주 받을 인형이 유능하기라도 했다면 이렇게 무섭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분노에 미쳐있을 뿐이었다. 주변 인간관계를 다 부수고 삶을 뒤엎겠다고 악에 받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삶을 폐허로 만들고 홀로 남고서야 자신이 벌인 짓을 후회할 걸 알았다.

나: 뭔가 잘못되고 있어요. 전에는 한 번도 거슬리지 않은 것들이 거슬려져요. 그때마다 화가 나고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아요. 제가 미쳐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호소하면 당연히 상담사도 함께 걱정해주리라 생각했다. 하다못해 대처 방법을 말해주리라 여겼다. 그런데 상담사의 반응은 예상과 영 달랐다. 그는 잔잔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흐뭇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나는 이어진 그의 말을 2025년 최고의 사이코패스 상 후보에 올릴 뻔했다.

상담사: 이럴 때 참 상담사로서 보람을 느껴요.


아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수상까지 했을 거다.

상담사: 지금 느끼시는 것들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에요. 심지어 굉장히 잘 해나가고 있어요.


그는 '심리학에는 이런 용어가 있는데...' 라고 전문 용어가 섞인 설명을 시작했다. 그때는 해맑은 미소와 발언의 갭으로 인해 내용이 잘 입력되지 않았다. 멍하니 상담사의 말을 돌림노래하듯 따라하기만 했다. 아, 게슈탈트요. 아하 통찰이요. 아하는 아하! 할 때 아하....근데 이거 방금 지어내신 말 아니죠?


전문가가 소개했으니 당연히 있겠지만, 의심을 거두지 못해 찾아보았다. 실제로 한국어로 '아하 통찰'로 번역된 용어가 있었다. 독일어 원문으로는 'Aha-Erlebnis'라고 한다. 사전적 정의를 옮기자면 '의미의 상관 관계가 갑자기 떠올라 이해하게 되는 현상'이다. 심리학에서는 '자신에게 어떤 정신적/심리적 문제가 있음을 자각하는 능력'이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용어가 있다는 건 나처럼 예고도 없이 이상한 나라의 토끼굴로 떨어지는 내담자가 꽤 많다는 걸 의미했다.


심지어 이 랜덤 토끼굴은 내면의 치유로 직행하는 웜홀(wormhole)이다. 통찰을 통해 발견한 해결책은 비통찰적 해결책보다 유효한 것으로 증명되었다니 말이다. 상담사 입장에서는 경험치+보상 n배 시크릿 던전이 열린 셈이다. 하지만 내담자이자 뉴비 유저인 내 입장에서는, '경험치는 쪼렙용 필드에서 천천히 쌓으면 안 될까요?'라고 묻고 싶었다.


야 저거랑 어케 싸워


이건 치료가 아니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당신이 몰라서 그런 거라고 공격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매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단호한 우리의 트레이너, 아니 상담사는 내게 '몸통박치기'를 권했다.

상담사: 괜찮아요. 다 부숴도 다시 쌓아올릴 수 있어요. 그리고 모두 무너지지도, 혼자 남지도 않을 거예요.


그는 장난스럽게 나를 부추겼다. 내가 저주받은 인형이라 여겼던 그것을, 내가 버려뒀던 나를 믿는다고 말했다.

상담사: 지금껏 몰랐을 뿐이지, 벽장 안에 있는 인형들은 모두 그 친구랑 같이 만든 거예요.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정교한 인격들이 만들어질 수 없어요. 사람 상대하는 일 잘 한다고 하셨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감동적인 격려지만, 그때는 기쁘게 인정하지 못했다. 기쁘긴커녕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상담사가 나보다 인형을 더 신경써주고 있는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사실 그래야 하는 게 맞다. 당시 내가 죽일 듯이 미워한 인형은 상담사의 도움이 필요한 나 자신이었으니까) 그래서 3회기를 끝내며 '당신을 못 믿는다'는 원망 어린 까지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상담을 끝내고 그의 말을 곱씹을수록 공포와 경계심이 누그러들었다. 더불어 내면의 인형에 대한 미안함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말하자면 공동창작자인데 작품에 대한 공로는 나만 누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기분 나쁠만 하구나 싶었다.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이해가 우러나오자, 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인형을 편들어줬더니 오히려 나를 잃는 순간이 줄기 시작한 것이다. 카를 융의 표현을 빌리면, 그건 에고(ego)가 셀프(self)와 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이후 며칠에 걸쳐 내면을 탐색하며 나는 그것이 인형보다는 인격체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 은폐된 건물 지하에서 묵묵히 노래와 각본을 만들어 지상에 올려보내는 고독하고 음침한 장인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와의 만남이 기묘하고도 다행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에릭의 결말이 너무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얼굴 반쪽이 일그러져 있으면 뭐 어떤가. 분명 그가 극장 밖으로 걸어나와 노래했다면 사람들은 한 소절만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설령 사람들이 도망쳤더라도 얼굴에 내리는 햇빛은 따듯하고 바람은 시원했을 텐데, 에릭은 그것만으로 구원 받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나는 유령의 지하 거주지를 지상 아파트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일명 '내 안의 유령 광합성하기' 프로젝트라 할 수 있겠다. 그 웅장한 계획은 데이트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 에피소드는 다음 글에서 풀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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