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친해지는 시간

오늘부터 우리 10,950일이다?

by 비탈

인생의 고통이 덮쳐올 때 버티는 방법은 제각각일 것이다. 내가 상담 이전에 쓰던 방법은 '유체이탈'이었다. 곤경이 생기면, 가령 부당한 요구를 하는 클라이언트나 화를 내는 동료를 맞닥뜨리면, 자동인형처럼 반응하는 사회적 인격만 쏙 빼놓고 머릿속 보물창고로 달려간다. 거기서 내가 모아둔 컨텐츠들을 다시 보는 거다. '아, 그 대사 정말 끝내줬지....' 이런 이유로 나는 좋아하는 책, 영화, 만화의 장면을 통째로 암기하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상담이 주는 고통은 그렇게 피해갈 수 없었다. 내면으로 도망치려 해도 내면이 개판이니 갈 데가 없는 것이다. 관심을 돌려보려 새 컨텐츠에 몰두하기도 했지만, 집중이 흐트러지면 어떤 목소리가 슬며시 다가와 '이런 식으로 회피해서 문제가 커졌죠? 근데 또 이런 식으로 회피하고 있죠?' 라고 속닥거리곤 했다.


피할 수 없는 L(ife is pain)의 공포


궁지에 몰린 나는 실존적 고통의 책임자를 찾으려 혈안이 됐다. 대체 누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범인은 너무 쉽게 잡혔다. 인생을 여기까지 끌고 온 나 자신. 그렇게 자기혐오와 자학심이 뭉쳐 내 안의 '유령'을 자극했고, 나는 또 한동안 유령과 열심히 드잡이를 해야 했다.


3회차 상담 이후 유령을 이해하게 된 나는 그와 화해할 방법을 모색했다. 자기개발서와 심리학 서적을 뒤적인 끝에 도출한 결론은 허무할 정도로 원론적이었다. 자기불신에 괴로워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바로 그 문장. 이름하야,


Love yourself


였다.


나는 이 문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 솔직히 말하면 어떨 땐 화가 나기도 한다. 나도 나의 멋지고 세련되고 깔끔한 부분은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지저분하고 게으르고 우울한 면은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친해지고 싶은 사람 옆에 딱 붙어있는 음침한 지인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사랑을 할 때 외모까지도 따지면서, 왜 본인의 못난 면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권하는 걸까?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난 유령을 구하고 싶었고, 그걸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나 한 명뿐이었다. 삼단논법에 따라 나는 그를 사랑해야 했다. 목표가 뚜렷하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 게 기획자의 숙명이었다. 고심 끝에 나는 아래와 같은 전략을 수립했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ver.비탈)

1. 유령과 나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한다.
2. 친구와 함께 있을 때처럼 유령을 세심하게 관찰한다.
3. 유령이 원하는 게 생기면 무조건 들어주고 최고의 선택이라고 추켜세운다.
4. 예쁨 받은 유령이 나를 좋아하게 된다.(호감도+1)

5. 위 과정을 최대한 많이 반복한다.



이 방법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법이 동원되었다. 내가 유령을 사랑하기 힘들면 유령이 날 사랑하면 되잖아?


아무튼 사랑하면 된 거임


그리하여 나는 1단계에 착수했다. 유령과 나를 분리하는 것. 그러려면 명확한 이미지가 필요했다. 다행히 나는 꾸준히 소설을 써왔고, 그 중에서도 캐릭터 분석에 자신이 있었다. 내 안의 그림자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신중하게 형태를 잡아갔다. 너무 작위적이면 내가 몰입할 수 없고, 너무 구체적이면 직면하기 괴로울 터였다.


유령은 타인을 불편해했다. 어둑하고 고요한 공간에서 뭔가를 만들고 싶어했다. 약간 사회성이 떨어지는 아이 같았다. 나는 눈치도 없이 그런 그를 사람이 많은 곳으로 내몰고 대화하기를 강요해왔다. 그렇다면 스트레스 때문에 잘 먹지도 자지도 못했을 것이다. '인간 알레르기'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공감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파리한 안색을 지닌 왜소한 아이였다. 얼굴 곳곳에 아토피처럼 벌건 부스럼이 일어난, 말은 없지만 예민한 아이.


유령의 모습이 구체화되자 한결 그에게 신경쓰기 쉬워졌다. 다음으로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매순간 그럴 수는 없었지만 뭔가를 먹거나 어디를 갈 때는 꼭 속으로 물어보았다. '괜찮아? 어떻게 하면 좋겠어?'


유령의 목소리는 대체로 미약했다. 몇 개의 선택지를 겹쳐 웅얼거리며 내뱉었고, 망설이는 기색만 내비치기도 했다. 이럴 때야말로 내가 활약할 순간이었다. 기획자로서 내가 길러온 스킬, 업체의 요구를 캐치하는 순발력과 눈치를 적극 활용해 유령에게 완벽한 에스코트를 안겨주었다. 그런 경험이 쌓이자 유령은 점차 직접 소통을 시도해왔다. 먼저 묻지 않아도 원하는 바를 얘기해주었다. 그러자 내게도 신선한 즐거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데도 둘이 다니는 듯했고, 그럼에도 온전히 내게 신경을 쏟을 수 있었다. A와 함께 있을 때조차 느끼지 못했던 평온한 안정감이 들었다.


이게 진짜 되네


그렇게 함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던 어느 날이었다. 햇빛 좋은 날 길을 걷다가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어렸을 때 나는 나 같은 사람을 원했구나.'


말하지 못한 속마음을 알아채주는 사람. 그걸 성심껏 들어주는 사람. 그러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없었기에 나는 그런 사람으로 나를 키웠다. 날 좀 세상에 데리고 나가 달라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지낼 수 있도록, 능숙하게 중재하고 보호해달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뒤부터 스스로가 무척 중요한 사람처럼 여겨진다. 뭔가를 해낼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나 자체가 자랑스러워졌다. 어린 나의 보호자인 내가 말이다. 물론 성과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고작 이것밖에 못하냐는 다그침이 들려올 때마다 나를 믿고 의지하는 어린 나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한다. 더불어 상담 1회기에서 했던 '어렸을 때는 내가 싫었다'는 발언도 반성 중이다.


모쪼록 내 사례가 'Love yourself'라는 난제를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각박한 세상 속에서 사랑을 지켜가는 모든 분들께 응원을 전한다.(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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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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