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나이롱환자가 됩시다
며칠 전에 지인을 만났다. 옛 동료이자, 뛰어난 유머감각의 소유자이자, 내가 신입일 적에 업무 에티튜드를 가르쳐주신 소중한 분이다. 공동 프로젝트 미팅을 하고 기분 좋게 밥을 먹던 중, 인생 최대의 변수가 되고 있는 이벤트에 대해 얘기했다.
나: 저 요즘 상담을 진행하고 있어요.
그러자 그분은 숟가락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뜨시며 물었다.
선생님이 상담도 하실 수 있었어요?
그 다정한 눈에는 내가 상담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순도 백 퍼센트의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황금처럼 빛나는 믿음에 나는 웃었고, 내가 내담자라고 정정함으로써 오해는 재밌는 헤프닝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대화에는 한 가지 불편한 구석이 있다. '상담을 받는다=정신적 문제가 있다'는 공식이 전제로 깔려있다는 점이다. 요즘도 나는 혼란과 충격의 파도에 휩쓸리며 몇몇 사람과(특히 a와) 격렬한 마찰을 빚고 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상담까지는 필요없지 않나?'하는 식의 말을 건네곤 한다. 그때마다 세간에 '상담 받는 사람'이 어떤지를 실감한다. 우울증, 공황장애, 자살충동, ptsd, 기타 정신병리학적 문제가 있는 사람 말이다.
물론 상담은 그런 분들께 더욱 필요하다. 하지만 상담이라는 단어에 즉시 병을 연결하고 싶지 않다. 정신병 환자를 구분 짓는 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정신병자'가 욕으로 사용될 정도로 정신병 환자에 대한 혐오가 만연하며, 때문에 주위 시선이 두려워 병원과 상담소를 찾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니 상담이 보컬수업이나 일일 클래스처럼 일상의 영역으로 들어와 더 많은 분들이 편하게 접했으면 한다.
하지만 그 수준까지는 갈 길이 멀다. 오은영 박사님 덕분인지 상담은 정신치료법 중에서 사회적 인식이 좋다. 그렇지만 전문성이 강조되어 비일상의 영역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담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 상대에게 내 정신건강의 위험도가 수직상승한다. 정신을 몸으로 치환하면 이런 식이다.
나: 요즘 일주일에 한 번씩 3차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있어.
친구: ? 뭐?
나: 병명은 아직 모르겠어. 원인 나올 때까지 계속 검사해보려고.
친구: ?????
이런 내담자-상담 비경험자의 간극을 줄이고자 요즘 나는 주변에 상담을 적극 홍보하고 있다. 인생이 안 풀릴 때 사주 보지 말고 성격기질 검사 하세요! 전문가가 말아주는 본인 캐릭터해석 한 입 드셔보세요!
내가 경험한 상담의 진가는 사후회복이 아닌 사전예방에 있다. 상담은 정신의 구조를 더 튼튼하게 정비해준다. 일상이 잘 굴러갈 때는 효과를 느끼지 못하지만, 일상이 무너졌을 때 충격을 빠르게 흡수하고 분산시킬 수 있게 된다.
만약 당신이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해보자. 보통 사람이라면 '아야'하고 일어서서 걸어갈 것이다. 그런데 만약 넘어지기 전부터 복사뼈에 금이 가 있었다면 어떨까? 젊은 시절 엄마는 그걸 모르고 억지로 걸으려다가 뼈의 실금이 벌어져 반년 가까이 기브스를 해야 했다.
정신의 골절은 뼈보다 훨씬 심각하다.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조그만 돌부리가 왜 이렇게 아플까, 하는 질문 뒤로 이런 질문들이 따라붙기 시작하면 사태가 악화된다.
왜 나만 이렇게 더디게 일어서지?
왜 남들 쫓아가기도 버겁지?
내가 약해서, 게을러서 그런 건가?
그렇게 자신을 채찍질하다가 한 걸음도 걷지 못하게 되서야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게 될 수도 있다. 슬프게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정신의 골절이 위험한 또 다른 이유는, 뼈 골절은 대략적인 치료 기간이 있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마음이 부러지면 다시 일어서기가 너무 어렵다고 한다. 그런 괴로운 일이 누구에게도 안 생겼으면 좋겠다.
내가 느끼기에 한국 사회는 개인의 고통을 무시한다. 그냥 무시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가스라이팅까지 한다. 내가 겪었던 질병도 그랬다. 지금도 주변에서는 '갑상선 암은 수술하면 완치라더라', '5년 후 생존률이 100%라더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나도 통념을 아무 생각없이 믿었다.
그런데 실제 환자가 되고 보니, 감당해야 할 고통이 너무 많았다. 갑상선을 전부 들어내면 평생 호르몬제를 복용해야 한다. 호르몬제의 부작용으로 기분장애가 생기거나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관절 통증이 올 수 있다. 수술 부작용으로 예전의 목소리를 잃을 수 있다. 떼어낸 암 조직이 유두암이 아닌 여포암 혹은 변이암으로 판정될 시 재수술을 해야 한다. 임파선 전이가 발견될 시 동위원소 치료를 해야 하며, 고농도 방사능을 알약 형태로 먹는 것이기에 침샘이 헐고 염증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치료를 한 뒤에도 완치는 없다. 암의 진행이 느려서 완치 판정 후에도 재발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체적인 고통과 공포는 환자가 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이 좀 더 알려져 있었다면 '갑상선 암은 암도 아니라더라'는 태평한 말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그 무신경한 말들에 받는 상처는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 고통 받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탐구한 후에는 주위에 널리 알려주었으면 한다. 비슷한 고통을 겪는 누군가가 '나도 아파요! 줄곧 여기가 아팠어요!'라고 외칠 수 있도록 말이다. 제발 못이 박힌 마음으로 나아가려 애쓰지 말자. 파상풍이 오기 전에 제때 뽑아내고 마음을 돌봐주면 좋겠다.
내 사견이지만, 한국에서는 나이롱환자가 되어야 진짜 환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한 번쯤 가까운 상담소를 찾아가 마음을 점검해보자. 혹시 또 모른다. 당신은 몰랐지만 정말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을지도. 그럼 마음을 잘 추스르고 떠나면 된다. 멀쩡하다면? 맛난 음식을 먹으며 마음을 잘 돌본 스스로를 칭찬해주시면 되겠다.
※보너스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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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서울시 한정 사업입니다.(찾아보면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복지는 있을 것 같습니다) 신청하시면 거주하는 자치구의 지역상담센터에서 가족 상담이 진행됩니다. 단, 대기자가 많아 기다리셔야 할 수 있어요. 저는 두 달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안내 받았는데 한 달 만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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