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성이란 마음 근육을 기르고 싶어

마음은 어떤 식으로 단련해야 하나요

by 비탈

앞서 7화에서 나는 자율성이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도대체 '자율성'이란 뭘까?

한국어 기초사전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정의되어 있다.


자율성: 남의 지배나 구속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성질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이건 흥에 겨운 망나니가 되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가령 나는 수술 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수술 전에는 매주 와인을 한 병(때로는 두 병) 마셨을 정도로 사랑했는데 말이다. 물론 인내하고 있을 뿐 마시고 싶은 마음은 크다. 거실에 놓인 미니 셀러를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만약 내가 자율성이 높아지면 '아무도 날 막을 수 없다!' 외치며 샴페인을 터트리게 될까?


이딴 게....자율성?


자율성을 높이기로 마음 먹었던 상담 초창기, 나는 이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 중 사회적으로 '건전하다'고 평가받는 것들이 모두 자율성 부족의 증거로 보였다. 책을 좋아하는 것,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는 것, 타인을 대할 때 예의와 친절을 지키려는 것 등등 말이다. 상담사가 자율성이 낮은 사람을 비유한 말, '착한 아이'라는 단어가 심히 거슬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시기에 쓴 일기를 보면 곳곳에 반항기가 엿보인다.



아침 공복상태로 짜파게티 먹기

영어숙제 안 하고 영어수업 가기

점심으로 마라탕 2단계로 먹기

퇴근 후 매일 걸려오는 A의 전화를 일부러 무시하기


아니 그때는 반항이었다고요 진짜


과연 이 하찮은 일탈이 자율성을 키우는데 도움이 됐을까? 짜파게티와 마라탕이 지방세포를 키우는 데 공헌한 건 확실하다. 하지만 자율성을 키우는 데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다. 왜였을까?


위 사전적 정의를 다시 보자. 여기에 함정이 있다. 자율성의 방점은 '남의 지배나 구속을 받지 않고'에 찍혀 있지 않다. 오히려 문장 뒤쪽,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성질'에 있다. 그 중에서도 '통제'에 꾹꾹 방점을 찍는다고 하겠다.


아까 예시로 돌아가, 나는 와인을 마실 수도 있고 마시지 않을 수도 있다. 행동 자체는 자율성과 직접 관련이 없다. 그 행동을 하게 된 원칙이 중요하다. '마시고 싶으니까 마신다'는 원칙이 아닌 욕구이다. 원칙은 욕구를 인정하되 그 외 가치들을 고려해서 세워진다. '흠. 술은 마시고 싶지만 건강도 무시할 수 없군. 이만큼 참았으니까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한 잔으로 내가 만족할 수 있을까?' 그런 주관적 가치들을 신속하고 폭 넓게 따질 수 있어야 자율성이 높은 것이다.


헛발질을 반복하던 나는 보다 전문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인터넷 검색과 현대인의 마음건강 PT강사, 챗GPT의 조언을 조합하여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자율성 일기'였다.


자율성 일기를 쓰는 법은 보통 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를 마치며 그날 있었던 사건을 적어주면 된다. 하지만 사건은 반드시 내 선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아니, 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모든 사건을 통제할 수 있어요? 비가 와서 산책을 못하면 그건 비 때문이잖아요?' 간단하다. 그럼 일기장에 적을 때 '비가 와서 산책을 안 하기로 결정함'이라 적으면 된다.


참 쉽죠?(세상을 살아갈수록 밥 아저씨의 마인드가 존경스럽다)


이렇게 적으면 같은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여러 가지라는 걸 알게 된다. 더불어 그 선택지들 중 내가 뭘 택했는지 확인하고, 결정에 어떤 가치가 개입했는지까지 알 수 있다. 내가 어떤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일기에 사건을 한 줄 적고 그 아래에 감정과 결과까지 적는다. 예시를 보여주자면 이렇다.



2025. XX. XX.(오늘 날짜)

1. 외출 준비를 하다보니 시간이 늦어서 버스 시간을 한 시간 늦췄다.(사건)

→일정을 한 시간씩 미뤄야 했지만 마음 편하다. 밥을 든든하게 먹을 수 있어서 능률이 올랐다.(감정과 결과)

2. 비가 많이 쏟아져서 걷기를 포기하고 택시를 탔다.(사건)

→돈은 들었지만 시간 여유가 생겨 좋다.(감정과 결과)

3. .....



자율성 일기를 쓰기 시작한지 한 달 반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그동안 쓴 일기를 훌훌 넘기다가 문득 나에 대한 신뢰가 이만큼 도톰하게 쌓였음을 발견했다. 남 보기에는 손해 같은 선택도 검토해보니 나만의 계산과 근거가 있었다. 그러자 스스로에게 붙여둔 수식어, 착한(위선적인)/정직한(순진한)/이타적인(호구같은)이라는 꼬리표 뒤에 현명한(나와 타인의 최선을 도모하는)을 살짝 붙여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나는 쫄보에서 벗어나 제주도 한달살기를 시작으로 180일간의 세계일주에 성공했다....고 적으면 좋겠지만, 사실 드라마틱하게 변한 건 없다. 여전히 도전은 두렵고 선택은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건 있다. 일이 망했을 때 '그래도 이게 최선이었다'고 진심으로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위로를 실패에 붙이는 반창고 삼아 야금야금 도전의 규모를 늘리고 있다.


이번 글은 내가 자율성 일기에 적은 문장을 인용하며 마치고 싶다.


내 마음에 대해 선명하게 알게 될수록, 삶의 난이도는 더 올라간다.
감정적 소망과 이성적 판단, 나 자신과 타인,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지를 찾고 싶어지니까.
괜찮다. 실패해도 괜찮다.
그게 진정한 나로 가는 과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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