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DNA, 경찰 조직을 해킹하다
스타트업 DNA, 경찰 조직을 해킹하다
엑셀 하는 경찰, 설득하는 PO,
그리고 30년 뒤를 꿈꾸는 기획자
경찰 조직은 거대한 항공모함과 같다.
묵직하고 안정적이지만, 방향을 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반면 나는 쾌속정 같은 스타트업 출신이다.
'일단 하고, 고치면서 달린다(Agile)'는 DNA가 뼛속까지 박혀 있었다.
"이 순경, 이거 이번 달 실적 통계 좀 내봐."
옆 자리 동료가 계산기를 두드리며 끙끙대는 걸 볼 때마다 내 안의 'PO(Product Owner) 본능'이 꿈틀거렸다.
1시간 걸려 수기로 작성하던 엑셀 표.
내 눈에는 그게 다 고쳐야 할 '버그(Bug)'로 보였다.
"제가 잠시만 봐도 될까요?"
나는 조용히 엑셀을 켰다. 함수 몇 개와 매크로를 섞어 '자동화 대시보드'를 뚝딱 만들었다.
엔터 키 한 번에 1시간짜리 업무가 5분 만에 끝났다.
"우와, 장 경장! 이거 마법이야?"
동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범인 잡는 건 선수지만 행정 업무 앞에선 작아지던 그들에게,
나는 '해결사'가 되었다.
단순히 컴퓨터를 잘하는 게 아니다.
문제를 발견하면 '시스템'으로 해결하려는 스타트업식 사고방식, 그게 바로 경찰 조직에서 나를 빛나게 하는 무기였다.
내가 일했던 태양광 스타트업은 '외계어'의 전쟁터였다.
개발자들은 "서버 트래픽이 어쩌고,
API 연동이 저쩌고" 하며 기술 용어를 쏟아냈고,
운영팀은 "그래서 돈이 되냐, 고객 니즈가 뭐냐"며 비즈니스 용어만 따졌다.
그 사이에서 PO였던 나는 '통역사'가 되어야 했다.
"무식해서 말 안 통한다"는 소리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무식하게 공부했다.
매일 평택에서 강남까지 왕복 4시간.
덜컹거리는 빨간 M버스 맨 뒷좌석이 내 도서관이었다.
멀미를 참아가며 C언어 개론서를 읽었고, 난해한 '판교 사투리(IT 은어)'를 달달 외웠다.
그렇게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자,
비로소 대화가 통했다.
"아, 개발팀장님 말씀은
지금 서버로는 무리라는 거죠?
그럼 운영팀엔 UI를
이렇게 바꾸자고 제안해 볼게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의 4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그 능력은 지금 경찰서에서 민원인 응대 할 때 빛을 발한다.
법률 용어를 들이미는 수사관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원인 사이에는
거대한 벽이 있다.
나는 그때처럼 다시 '통역'을 한다.
딱딱한 법률 용어를 민원인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어주고, 흥분한 민원인의 거친 감정을 정제된 언어로 동료에게 전달한다.
개발자와 기획자 사이를 뛰어다니던 PO의 땀방울은, 이제 시민과 법 사이를 잇는 가장 튼튼한 다리가 되었다.
스타트업에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헝그리 정신이 있다.
이 야생성을 경찰 업무에 적용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얼마 전,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흉기 난동 예고글'과 관련해 경찰청에서 공중협박죄 예방 홍보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보통은 "예산도 없고 인력도 없는데 뭘 해?" 하며 지방청 자료를 기다리거나 포기하기 일쑤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내 머릿속엔 이미 기획안이 그려져 있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 섭외: 과거 로드매니저 인맥을 총동원해 지역 거주 연예인을 직접 섭외했다.
• 기획: PO 경험을 살려 MZ세대에게 먹힐 만한 임팩트 있는 콘티를 짰다.
• 제작: 촬영부터 편집까지, 외주 없이 내 손으로 다 했다.
기획부터 실행(Launch)까지 다이렉트로 꽂아버리는 속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경찰이 이런 영상도 만들어?"
보고만 하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직접 발로 뛰어 결과물(Product)을 만들어내는 '실행력'. 그것이 내 무기다.
스타트업이 시장의 트렌드(Market Fit)를 읽듯, 나는 경찰청의 '정책 트렌드'를 읽는다.
"올해 청장님 강조 사항이 이거구나."
방향이 잡히면 망설이지 않는다.
그해 시책에 딱 맞는 사업계획서를 빠르게 작성해 공모전에 던진다.
남들은 "일 더하기 싫다"며 피할 때, 나는 그것을 기회(Opportunity)로 낚아챈다.
내 보고서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PO 시절 투자자를 설득하기 위해 IR 자료를 만들던 감각으로, 결재권자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정확히 짚어내고 숫자로 증명한다.
"야, 보고서 깔끔하다. 역시 경력 채용은 다르네."
그 칭찬은 나에게 단순한 격려가 아니다.
딱딱한 관료제 조직 안에서도 창의적인 기획이 통한다는 짜릿한 증명이다.
"경찰관이 엑셀 좀 하면 뭐 해?
범인만 잘 잡으면 되지."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범인을 잡는 건 수갑이지만, 범죄를 예방하고 조직을 바꾸는 건 '새로운 시각'이라고.
나의 20대는 치열한 스타트업의 전장이었고, 흔들리는 M버스 안이었다.
그때 흘린 땀방울은 증발하지 않고 내 안에 남아 'DNA'가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오늘도 엑셀로 야근을 줄이고, 기획서로 예산을 따내며, 민원인의 마음을 통역하는 '대체 불가능한 경찰'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