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로 출근하는 N잡러 -제 5화 기획의 진심

도박 중독 고등학생과 '잠긴' 적금 통장

by 장경장

​제 5화 기획의 진심


도박 중독 고등학생과 '잠긴' 적금 통장


​1. 매주 수요일, 나는 속고 있었다


​"경장님, 사실 제 친구 A도... 아직 못 끊었어요. 저한테 도박 자금도 빌려줬어요."
​도박을 끊고 싶다며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와 '자진 신고'를 한 기특한 학생과

면담하던 중이었습니다.


아이가 어렵게 꺼낸 이름, A.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A는 작년 11월, **청 사이버수사대에 도박으로 적발되었던 아이였습니다.


당시 '선도심사위원회'를 거쳐

형사 입건 대신 훈방 처분을 받았고,

이후 관할 경찰서인 제가 넘겨받아

3개월간 '위기 청소년'으로 관리하고 있는 대상자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주 수요일마다 기계적으로

A에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A야, 이번 주는 어때? 별일 없지?"
"네, 경장님! 저 학교 잘 다니고 있어요.

도박은 생각도 안 나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A의 목소리는 늘 씩씩했습니다.


저는 그 씩씩함에 속아, 관리 대장에 습관처럼 '특이사항 없음', '단도박 유지 중'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제 서류상으로 A는

'교화가 잘 되고 있는 모범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A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 까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 끝은 A가 아닌 제 자신을 향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뭘 한 거지? 전화 한 통으로 할 일 다 했다고 착각한 거 아닌가?


'​관리자 편의주의적인 '형식적 모니터링 시스템'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2. "살려주세요"라는 고백


​저는 당장 A를 불러냈습니다.

딱딱한 조사실 공기는 아이의 입을 더 다물게 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녀석을 데리고 경찰서 근처 조용한 공원 벤치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눈을 피하며 잡아떼더군요.

​"저 진짜 안 했어요. 억울해요 경장님."
​하지만 구체적인 정황과 증거를 들이밀자,

끝까지 버티던 아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이내 팽팽하던 긴장의 끈이 끊어지듯,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며 무너져 내렸습니다.

​"죄송해요... 사실은... 안 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돼요. 저도 미치겠어요. 끊고 싶은데 머릿속에서 안 떠나요. 경장님, 저 좀 도와주세요..."


​거짓말쟁이의 가면이 벗겨진 자리에는, 도박이라는 질병에 걸려 신음하는

10대 소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건 범죄자의 뻔뻔한 변명이 아니라,

늪에 빠진 사람의 처절한 구조 요청이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매주 울리는 감시 전화가 아니라,

늪에서 건져 올려줄 확실한 동아줄이라는 것을요.


저는 그날 결심했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이 아이의 삶에 진짜로 개입(Intervention) 하기로 말입니다.


​3. 토트넘 vs 맨유, 돈 대신 '약속'을 걸다


​한번 솔직해지니 아이는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의지만으로 끊기에 유혹은 너무 강했습니다.


​"경장님, 솔직히... 이번 주말에 토트넘이랑 맨유 경기 있거든요? 와, 진짜 딱 한 번만 걸고 싶어서 미치겠어요."


​아이는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습니다. 보통의 경찰이라면 "정신 안 차려?

또 도박할 거야?"라고 혼냈겠지만,

저는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무조건 참으라는 말은

아이에게 들리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 빅매치니까 보고 싶긴 하겠다. 그럼 우리 돈 거는 거 말고, 다른 내기할까?"
"다른 거요?"
"누가 이길지 예측해서,

진 사람이 다음 주 면담 장소로 찾아가는 거야. 네가 이기면 내가 너희 동네로 가고,

내가 이기면 네가 경찰서로 오는 거지."


"오, 좋아요! 제가 토트넘 걸게요.

경장님, 저희 동네 오셔야 될걸요? 흐흐."
​아이는 신나서 내기를 받아들였습니다.


녀석의 집에서 경찰서까지는 버스로 40분. 꽤 귀찮은 거리였지만,

아이는 돈 대신 '약속'을 걸었습니다.


​주말이 지나고 일요일 저녁,

아이에게 먼저 문자가 왔습니다.


[경장님... 제가 졌네요.

담주에 경찰서로 가야겠네요 ㅠㅠ]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도박 사이트에 접속하는 대신,

담당 경찰관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문자를 보낸 아이.


그것은 우리가 '라포(신뢰)'라는 끈으로 연결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4. 도파민을 차단하는 가장 확실한 '락인(Lock-in)' 전략


​마음이 연결되었으니,

이제는 물리적인 환경을 바꿀 차례였습니다.

저는 다시 스타트업 기획자(PO)의 모드로 돌아갔습니다.


​'이 아이(유저)가 왜 도박(서비스)에서

이탈하지 못할까?'
가장 큰 문제는 돈(Money)이었습니다.


아르바이트비나 용돈이 생기면,

그 돈은 1초 만에 도박 사이트의 충전금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뇌가 도파민에 절여진 상태에서 아이의 의지만으로 돈을 지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A야, 우리 '돈의 흐름'부터 바꾸자."
​저는 A와 부모님을 함께 모시고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A 명의로 적금 통장을 하나 만듭시다.

단, 비밀번호는 부모님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핵심은 '입금은 자유롭되, 출금은 불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적금의 만기는

A가 성인이 되는 날로 설정했습니다.


​"지금 도박으로 날릴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꿈을 위한 종잣돈으로 쓰자."


​단순히 "하지 마"라고 억압하는 통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참으면, 네 미래가 바뀐다"는 확실한 보상 시스템을 설계해 준 것입니다.


아이의 탁했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돈이 도박 사이트 운영자의

배를 불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위해 쌓인다는 감각.

그것은 A가 난생처음 느껴보는

'건강한 성취감'이었습니다.


​[Police Insight: 다시 믿어주는 용기]


​경찰의 일은 범인을 잡는 것(Arrest)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특히 그 대상이 아직 자라고 있는 청소년이라면, 우리의 최종 목표는

'처벌'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합니다.

경기남부경찰청에서 운영 중인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Go-Back(고백)'입니다.

자신의 죄를 털어놓는다는 '고백(Confession)'의 의미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Go Back)'는 중의적인 뜻을 담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아이들에게 속을 수도 있고, 배신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은 지루하고 때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배신감 때문에 아이를

포기해선 안 됩니다.
어른이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준다면,

아이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오늘도 저는 10대 도박 중독자 A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적금을 붓고 있습니다.


이 통장에 쌓이는 것이 단순한 돈이 아니라, 아이가 되찾을 '평범한 내일'이기를 기도하며 말입니다.


이전 05화경찰서로 출근하는 N잡러 -제 4화 머리의 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