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 중독 고등학생과 '잠긴' 적금 통장
"경장님, 사실 제 친구 A도... 아직 못 끊었어요. 저한테 도박 자금도 빌려줬어요."
도박을 끊고 싶다며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와 '자진 신고'를 한 기특한 학생과
면담하던 중이었습니다.
아이가 어렵게 꺼낸 이름, A.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A는 작년 11월, **청 사이버수사대에 도박으로 적발되었던 아이였습니다.
당시 '선도심사위원회'를 거쳐
형사 입건 대신 훈방 처분을 받았고,
이후 관할 경찰서인 제가 넘겨받아
3개월간 '위기 청소년'으로 관리하고 있는 대상자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주 수요일마다 기계적으로
A에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A야, 이번 주는 어때? 별일 없지?"
"네, 경장님! 저 학교 잘 다니고 있어요.
도박은 생각도 안 나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A의 목소리는 늘 씩씩했습니다.
저는 그 씩씩함에 속아, 관리 대장에 습관처럼 '특이사항 없음', '단도박 유지 중'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제 서류상으로 A는
'교화가 잘 되고 있는 모범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A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 까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 끝은 A가 아닌 제 자신을 향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뭘 한 거지? 전화 한 통으로 할 일 다 했다고 착각한 거 아닌가?
'관리자 편의주의적인 '형식적 모니터링 시스템'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당장 A를 불러냈습니다.
딱딱한 조사실 공기는 아이의 입을 더 다물게 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녀석을 데리고 경찰서 근처 조용한 공원 벤치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눈을 피하며 잡아떼더군요.
"저 진짜 안 했어요. 억울해요 경장님."
하지만 구체적인 정황과 증거를 들이밀자,
끝까지 버티던 아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이내 팽팽하던 긴장의 끈이 끊어지듯,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며 무너져 내렸습니다.
"죄송해요... 사실은... 안 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돼요. 저도 미치겠어요. 끊고 싶은데 머릿속에서 안 떠나요. 경장님, 저 좀 도와주세요..."
거짓말쟁이의 가면이 벗겨진 자리에는, 도박이라는 질병에 걸려 신음하는
10대 소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건 범죄자의 뻔뻔한 변명이 아니라,
늪에 빠진 사람의 처절한 구조 요청이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매주 울리는 감시 전화가 아니라,
늪에서 건져 올려줄 확실한 동아줄이라는 것을요.
저는 그날 결심했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이 아이의 삶에 진짜로 개입(Intervention) 하기로 말입니다.
한번 솔직해지니 아이는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의지만으로 끊기에 유혹은 너무 강했습니다.
"경장님, 솔직히... 이번 주말에 토트넘이랑 맨유 경기 있거든요? 와, 진짜 딱 한 번만 걸고 싶어서 미치겠어요."
아이는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습니다. 보통의 경찰이라면 "정신 안 차려?
또 도박할 거야?"라고 혼냈겠지만,
저는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무조건 참으라는 말은
아이에게 들리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 빅매치니까 보고 싶긴 하겠다. 그럼 우리 돈 거는 거 말고, 다른 내기할까?"
"다른 거요?"
"누가 이길지 예측해서,
진 사람이 다음 주 면담 장소로 찾아가는 거야. 네가 이기면 내가 너희 동네로 가고,
내가 이기면 네가 경찰서로 오는 거지."
"오, 좋아요! 제가 토트넘 걸게요.
경장님, 저희 동네 오셔야 될걸요? 흐흐."
아이는 신나서 내기를 받아들였습니다.
녀석의 집에서 경찰서까지는 버스로 40분. 꽤 귀찮은 거리였지만,
아이는 돈 대신 '약속'을 걸었습니다.
주말이 지나고 일요일 저녁,
아이에게 먼저 문자가 왔습니다.
[경장님... 제가 졌네요.
담주에 경찰서로 가야겠네요 ㅠㅠ]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도박 사이트에 접속하는 대신,
담당 경찰관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문자를 보낸 아이.
그것은 우리가 '라포(신뢰)'라는 끈으로 연결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마음이 연결되었으니,
이제는 물리적인 환경을 바꿀 차례였습니다.
저는 다시 스타트업 기획자(PO)의 모드로 돌아갔습니다.
'이 아이(유저)가 왜 도박(서비스)에서
이탈하지 못할까?'
가장 큰 문제는 돈(Money)이었습니다.
아르바이트비나 용돈이 생기면,
그 돈은 1초 만에 도박 사이트의 충전금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뇌가 도파민에 절여진 상태에서 아이의 의지만으로 돈을 지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A야, 우리 '돈의 흐름'부터 바꾸자."
저는 A와 부모님을 함께 모시고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A 명의로 적금 통장을 하나 만듭시다.
단, 비밀번호는 부모님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핵심은 '입금은 자유롭되, 출금은 불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적금의 만기는
A가 성인이 되는 날로 설정했습니다.
"지금 도박으로 날릴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네 꿈을 위한 종잣돈으로 쓰자."
단순히 "하지 마"라고 억압하는 통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참으면, 네 미래가 바뀐다"는 확실한 보상 시스템을 설계해 준 것입니다.
아이의 탁했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돈이 도박 사이트 운영자의
배를 불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위해 쌓인다는 감각.
그것은 A가 난생처음 느껴보는
'건강한 성취감'이었습니다.
경찰의 일은 범인을 잡는 것(Arrest)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특히 그 대상이 아직 자라고 있는 청소년이라면, 우리의 최종 목표는
'처벌'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합니다.
경기남부경찰청에서 운영 중인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Go-Back(고백)'입니다.
자신의 죄를 털어놓는다는 '고백(Confession)'의 의미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Go Back)'는 중의적인 뜻을 담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아이들에게 속을 수도 있고, 배신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은 지루하고 때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배신감 때문에 아이를
포기해선 안 됩니다.
어른이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준다면,
아이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오늘도 저는 10대 도박 중독자 A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적금을 붓고 있습니다.
이 통장에 쌓이는 것이 단순한 돈이 아니라, 아이가 되찾을 '평범한 내일'이기를 기도하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