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다"는 말은 "살리고 싶다"는 역설이다
"죽고 싶다"는 말은 "살리고 싶다"는 역설이다
SPO(학교전담경찰관)를 맡은 지 이제 9개월. 짧다면 짧은 이 기간 동안,
저는 벌써 세 명의 아이를 떠나보냈습니다.
어른들은 묻습니다.
"왕따를 당했나요?",
"성적 비관인가요?",
"가정폭력인가요?"
우리는 죽음에서 명확한 인과관계를 찾으려 합니다.
그래야 납득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목격한 현장은 달랐습니다.
겉보기엔 너무나 평범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병이 있는 것도, 심각한 괴롭힘을 당한 흔적이 드러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은 '자살 동반 모임'이라는 오픈 채팅방에서 처음 만난 아이들이,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함께 투신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건 거창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들.
"그냥 사는 게 재미없어요."
"아무도 내 얘기를 안 들어줘요."
마음속 컵에 물이 한 방울씩 차오르다,
결국 표면장력을 잃고 넘쳐버린 순간.
아이들은 조용히,
그리고 충동적으로 끈을 놓아버렸습니다.
그 '이유 없음'이 제게는 더 큰 공포와 무력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아니 잊을 수 없는 아이가 있습니다.
하교 후,
자신의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진 한 중학생. 현장에서 발견된 유서,
아니 마지막 메모는
저를 한참 동안 멍하게 만들었습니다.
보통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찰 거라 생각하지만,
아이의 마지막 편지는 너무나 담담했습니다.
"이 사회는 너무 답답하고 싫다. 하지만 우리 선생님, 내 친구들은 죄가 없다. 다들 너무 고마웠다. 나는 이제 먼 여행을 떠나려 한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시스템)'에는 질식할 것 같았지만,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남긴 아이.
그 모순된 문장들 사이에서 아이가 얼마나 치열하게 외로웠는지 느껴졌습니다.
"나 좀 제발 도와주세요. 나 좀 붙잡아주세요."
그 유서는 '먼 여행'을 떠나겠다는 통보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위로가 아니었을까요.
현장을 수습하며 저는 스스로에게 되물었습니다.
'도대체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력감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보내는 아주 작은 '구조 신호(Sign)'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저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2025년 12월, 저는 '위기협상전문가(Crisis Negotiation)' 교육 과정을 이수했습니다. 테러나 인질극 상황뿐만 아니라,
자살 시도자와 같은 극도의 위기 상황에서
대화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전문가 과정입니다.
그리고 2026년부터는 '위기협상연구회'에 가입해 실제 사례를 분석하고 대화 기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협상(Negotiation)이라고 해서 화려한 언변으로 상대를 설득하거나 이기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위기 협상의 핵심은 '적극적 청취(Active Listening)'였습니다.
"죽지 마"라고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얼마나 힘든지 나에게 말해줄 수 있니?"라고 물어봐 주는 것.
벼랑 끝에 선 아이에게 필요한 건 정답을 제시하는 해결사가 아니라,
"네 편이 되어줄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줄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강합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어주고,
진심으로 편이 되어주면 충분히 이겨낼 힘이 있습니다.
앞으로 겪을 행복이 슬픔보다 훨씬 더 많다는 걸, 아이들은 아직 모를 뿐이니까요.
저는 오늘도 협상 테이블에 앉는 마음으로
학교에 갑니다.
제 말하기 기술이 범인을 잡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는 말은 너무 진부합니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고 있다'는
감각은 실제로 사람을 살립니다.
아이들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을 때,
경찰관인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수사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저 그 무너진 잔해 속에 기꺼이 함께 주저앉아, 당신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제가 '위기 협상'을 배우는 이유이자, 우리가 아이들에게 건네야 할 마지막 골든타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