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를 넘어 실존으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 문장은 오래전 구약 율법에 기록되었고, 예수가 이를 인류 윤리의 핵심으로 재확인한 이후, ‘황금률(Golden Rule)’이라는 이름으로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도덕의 중심이 되었다.
형식은 달라도 본질은 같다.
공자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 했고(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다른 이에게 행하지말라),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고 말했다.
불교에서도 “자신에게 해롭다고 여기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반복된다.
이러한 황금률은 흔히 ‘보편 윤리’ 혹은 ‘종교적 계명’으로 간주된다.
타인을 해치지 말 것,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것, 그리고 인간 사이에 최소한의 공감을 실천할 것.
그러나 이 보편성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순간, 황금률은 평범한 도덕문구로 축소된다.
진정한 질문은 여기서부터다.
왜 우리는 타인을 나처럼 대해야 하는가?
그것은 단지 윤리적 요청 때문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곳 — 나 자신을 알기 위한 길이기 때문은 아닐까?
황금률이 진정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타인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속에 나 자신이 드러날 때다.
누군가에게 툭 던진 말, 무심한 침묵, 혹은 외면 속에서 나는 나의 태도, 성격, 상처, 나아가 존재의 방식까지 마주하게 된다.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라고 했다.
그 말은 불편하지만 진실이다.
왜냐하면 타인은 나의 계산과 욕망, 방어기제를 여지없이 흔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옥 같은 타인 앞에서, 우리는 동시에 자신을 비추는 가장 선명한 거울을 만나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인간은 오직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만 드러난다.”
즉, 나라는 존재는 결코 독립적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나는 너를 통해 나를 배우고,
너의 반응 속에서 나의 윤곽을 그리게 된다.
황금률은 이 관계의 문을 여는 말이다.
칸트는 “너의 행위가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하라”고 했고, 이것은 황금률의 이성적, 도덕적 정식화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도덕 교과서처럼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순간의 감정에 흔들리고, 타인을 질투하거나 외면하고 싶어지며, 어떤 날은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상처를 남긴다.
바로 그때 황금률은 다시 소환된다.
그것은 “남에게 잘하라”는 공허한 구호가 아니다.
오히려 “너는 지금 누구로 살고 있는가?”라는 실존의 질문이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말한다. ‘나를 죽이지 말라’”고 했다.
이때 타인의 얼굴은 도덕적 대상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외침이다.
황금률은 그 외침에 응답하는 우리의 방식이다.
우리는 종종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황금률을 따르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함’의 문제가 아니다.
황금률은 나 자신이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한 가장 깊은 감각이다.
내가 타인에게 던진 언어의 결이 결국 나를 만든다.
내가 외면한 고통은 언젠가 내 안에서 텅 빈 구멍이 된다.
그리고 내가 품은 타인의 상처는 결국 내 세계를 지탱하는 단단한 토대가 된다.
그러니 황금률은 삶의 기술이 아니라 삶의 태도다.
그것은 높은 이상이 아니라 매일의 실천 속에서 작동하는 조용한 철학이다.
타인을 나처럼 대하라는 말은,
결국 나를 나처럼 살게 하라는 요청이다.
그것은 사랑이자 책임이며, 동시에 자각이다.
황금률은 윤리의 문장에서 시작해, 실존의 문턱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그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도덕적인 인간이 아닌 존재하는 인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