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정답이 있을까.
우리는 자주 사랑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랑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더 잘 사랑할 수 있는지, 또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사랑이 맞는 방향인지. 그런 질문을 품고 있을 때면 사랑은 마치 수학처럼 명확한 정답이 존재하길 바라는 문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랑은 교과서가 없고, 공식도 없으며, 정답지를 펼쳐보아도 여백만 가득한 서술형 질문이라는 것을.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간다 했다.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할 때, 그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지나치게 많은 조언은 오히려 본질을 흐리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해결하기 힘든 어떤 감정의 매듭 앞에 서면, 여럿의 시선과 생각이 하나의 빛줄기처럼 내 안을 환하게 밝혀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생긴다. 그런 희망이 나를 타인의 조언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누군가의 말이 대신 정리해 주기를, 그 말이 나의 감정에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사람은 정말 다양하다. 같은 말을 듣고도 각기 다르게 해석하고, 같은 문제 앞에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일반적인 해결책이 존재하더라도, 그 해결책이 정말 내게도, 또는 '너'에게도 통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정답이 있어도, 그 정답이 나에게 맞는 답안지에 들어맞을 거란 보장은 없다.
결국 나의 선택은 나의 몫이다. 그런데도 결정의 순간마다 자꾸 '너'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든 너는 너대로 반응할 테지만, 그 반응이 너를 아프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선다. 나의 말 한마디, 나의 선택 하나가 너에게 또 다른 상처로 남을까 두려워, 쉬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그렇다면 이 애매한 경계에 있는 우리 사이의 문제는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대화? 그렇다면 대면해서 마주 앉아 말하는 게 해결책이 될까. 대화는 늘 옳은 수단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가장 날것인 언어의 교환이기도 하다. 말은 의도를 왜곡하고, 감정은 그 왜곡을 키운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더라도, 각자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과연 소통일까. 결국,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보단 또 다른 오해의 시작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묻다 보면, 싸움과 화해, 갈등과 봉합의 반복이 얼마나 허무한 소모일까 싶다. 마치 불필요한 감정노동을 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아무런 충돌 없이, 그저 웃으며 관계를 이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다 생의 마지막 순간, 단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며 "고마웠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완성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걸까. 그들 사이의 유대는 얼마나 단단한 것일까. 이해와 배려, 타협과 관용—이 모든 단어들이 그들 사이에 오가는 걸까. 혹은,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사랑이 서로를 위한 작은 희생의 연속이라면, 과연 희생은 사랑의 본질인가? 누군가의 욕구를 감추고, 내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아니면,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억누르는 행위는 사랑의 탈을 쓴 자기기만일 뿐일까. 이 질문은 끝이 없다. 희생 없는 사랑은 이기적이고, 희생뿐인 사랑은 파괴적이다. 그 중간을 찾기란 언제나 어렵다.
그러다 문득, 사랑을 감정이 아닌 기술이라고 말한 에리히 프롬이 떠오른다. 기술이라면 익혀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수없이 실패해 봐야 더 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 역시 반복과 시도 끝에 조금씩 나아지는 ‘능력’ 일지도 모른다. 감정에만 의존한 사랑은 늘 불안정하다. 기술로써의 사랑은 훈련을 요구하고, 그 훈련은 곧 더 깊은 이해와 성장을 만든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묻는다.
사랑에는 정답이 있을까.
만약 정답이 없다면, 적어도 '너와 나에게 가장 가까운 정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건 아마 완벽한 해답이 아니라, 함께 수정해 나갈 여백이 있는 어떤 상태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함께 써 내려가는 하나의 긴 답안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