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감옥

by 최윤형

사랑한다고 왜 말을 못 하니


감정을 쉽게 보여주지 말라는 말은 흔히 성숙함과 연결된다. 분노, 슬픔, 짜증, 불안 심지어 사랑까지—이 감정들을 드러내지 않고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어른스럽다고 여겨진다. 사회는 감정의 표현보다 억제를 미덕이라 가르치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이들에게 신뢰를 부여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의 마음에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네고 위로를 건넬 줄 아는 이들은 오히려 감정을 억누르지 말라고 조언한다. 슬픔을 참고 견디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질지 몰라도, 그 감정은 삭일수록 마음속을 잠식하고, 분노 또한 표현하지 않으면 마음 깊은 곳에 괴물처럼 쌓여 병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결국 감정은 조절 가능한 방식으로 건강하게 표출되어야 한다. 눈물이 흐르는 날에는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하고, 짜증이나 불안이 밀려올 땐 스스로 감정을 해석하고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연습이자 자기 보존의 시작점이다.


문제는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고, 때로는 표출 자체가 두려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감정의 표현이 또 다른 상처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걸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감정을 쉽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혼자 울지언정, 타인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쓴다.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곧 자존심을 낮추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감정이 누군가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 눈물은 내 부모님 앞에서만 허용된다고 여겼다.


스물다섯이 된 지금, 부모님 앞에서조차 눈물을 보이는 일이 쉽지 않다.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고, 그 앞에서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부모님의 눈에 듬직한 아들로 남고 싶다는 바람은 내가 감정을 억제하는 이유가 되었다.


당신은 어떠한가? 슬픔이 밀려올 때, 감정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그 감정이 되려 당신을 갉아먹고 있지는 않은가?


분노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싸움을 피하는 편이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의 갈등이 있을 때도 주먹다짐은 피했다. “굳이?”라는 말이 내 삶의 태도였다. 싸움은 감정과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일이고, 그 결과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크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분노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어떤 밤은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상상 속의 상대에게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는 싸움을 피하는 데 있지 않았다. 분노를 올바르게 식히는 방법을 몰랐다는 데 있었다.


슬픔과 분노는 자칫 잘못 표출되면 타인의 연민이나 동정을 마주해야 하며, 이는 오히려 자존심을 깎을 수 있다. 게다가 상대가 내 편이 아닌 무작위의 타인이라면, 그 감정은 오해와 거리감을 낳기 쉽다. 그래서 감정을 숨기는 건 어떤 면에서 전략이다. 나를 보호하고, 관계의 갈등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어기제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떨까? 사랑은 감정 중 가장 강한 긍정성을 띄지만, 그만큼 표출에 있어 가장 큰 용기를 요구한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전제 아래, 사랑은 표현되어야만 의미가 생긴다. 그러나 그 시작점에는 항상 두려움이 있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로 인해 자존감이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결국 사랑도 자기 방어의 연장선에 놓인 감정이다. 슬픔은 나를 약하게 만들고, 분노는 나를 위험하게 만들며, 사랑은 나를 취약하게 만든다. 감정을 숨기라는 말은 그래서 더 단단해지고, 더 성숙해지기 위한 일종의 훈련이기도 하다.


말을 줄이라는 조언 또한 같은 맥락이다. 말은 감정을 드러내고, 감정은 곧 에너지를 소모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단해진다는 것은 감정을 숨긴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을 '제대로 다룰 줄 안다'는 뜻이다. 감정을 무시하지도, 억압하지도, 마구 흘리지도 않는 것. 나의 감정을 책임지는 태도, 그것이 진짜 성숙함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감정을 쉽게 보여주지 말라는 말은, 결국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인가, 아니면 우리를 고립시키는 감옥인가?


그 답은 당신의 감정 앞에서, 당신만이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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