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등꽃 같네. 서울 우리 학교에 큰 등나무가 있었단다.저 꽃을 보니까 등나무 밑에서 놀던 동무들 생각이 난다.”
소녀가 조용히 일어나 비탈진 곳으로 간다. (후략)
‘소년과 소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의 일부다. 소녀가 비탈에 핀 칡꽃을 보고 했던 말이다. 칡과 등나무는 꽃 색깔이나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건물을 지을 때는 순서가 있다. 먼저 기둥을 세우고 그사이에 벽을 쌓는다. 만약 기둥 없이 벽만 쌓아 건물을 짓는다면 어떻게 될까? 내구성이 떨어져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수고를 적게 들이고 신속하게 지을 수 있다.
식물 중에도 기둥을 세우는 수고를 줄이면서 벽만 쌓아 자라는 독특한 종이 있다. 덩굴식물이다. 이들은 기둥에 해당하는 줄기 생장에 필요한 에너지를 절약한다. 덕분에 남는 에너지를 활용해 빨리 자라고 거친 환경에도 버티는 강점이 생겼다.
덩굴식물은 다른 식물을 감고 있어 서서 견뎌야 하는 수고도 덜고 최소한의 힘만 소비한다. 이런 얌체 같은 능력으로 주변 식물과의 생존경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인간의 삶과 밀접했던 칡과 등나무가 이 덩굴식물이다.
줄기가 매년 굵어져 나무로 분류되는 칡은 ‘기대감’이라는 느낌이 생생하다. 내가 어렸을 때 초겨울의 분주했던 기억이다. 당시 귀한 먹거리였던 칡뿌리를 캘 때는 기대감이 높았다. 칡은 앞부분이 두껍다가 땅을 파면 뒷부분이 쥐꼬리라 실망할 수 있지만 가늘게 시작해 제법 두툼한 암칡이 나올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등나무는 ‘시원함’이라는 참신한 추억이 남아있다. 학창 시절의 캠퍼스에는 등나무가 우거진 쉼터가 있었다. 한여름 그곳에서 누렸던 시원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칡과 등나무는 단독생활보다 같이 살 때 이슈가 생긴다. 시계방향과 반시계 방향으로 줄기가 감는 방향이 다르다. 당연히 꼬일 수밖에 없고 풀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이 상황을 빗대어 유래한 심리학적 언어가 바로 ‘갈등’이다. 칡의 한자 ‘갈(葛)'과 등나무의 ’등(藤)'이 조합되어 만들어졌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므로 인간 사회에서 갈등 상황은 일반적인 현상이며 형태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갈등을 단순하게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없다면 자연의 섭리를 깨달아야 한다.
칡과 등나무의 생장 방향의 차이가 갈등의 시작이었다. 즉, ‘다름’이 갈등을 일으켰다. 그런데 다른 게 틀린 것은 아니므로 다름이 무엇인지 아는 게 우선이다. ‘다름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이것이 자연이 전해주는 갈등 해결의 실마리 ‘이해’이다.
갈등은 부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긍정의 결과를 이끌기도 한다. 갈등이 승부가 아니라 욕구나 가치관의 차이라면 열린 대화를 시도하여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갈등이 없다면 성장을 위한 변화도 적다. 때로는 그러한 얽히고설킴이 끈끈한 결속이 될 수 있다.
칡과 등나무는 콩과(科)의 낙엽 활엽수이다. 과거 칡은 구황작물이었고 지금도 약용으로 활용한다. 등나무는 방패 제작이나 공예재료로 활용했다. 둘 다 밀원식물이고 비탈이나 황무지에도 잘 자라 산사태를 방지한다.
숲이 우거지고 대체제가 발달한 오늘날은 활용도나 긍정적인 역할이 감소했다. 오히려 골칫덩어리다. 생명력이 지나치게 강해 주변 식물의 양분을 가로채고 빛을 차단한다. 숲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무법자가 되어 이들 제거에 노동력이 소모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