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산소’ ‘피톤치드’는 식물이 공통으로 내뿜는 물질이다. 이 물질들이 재료가 되어 사람들이 좋아하는 밥상이 숲속에 차려진다. 메뉴는 청량감, 쾌적함, 향긋함이다. 그리고 이 느낌은 한여름에 가장 강렬하다.
불볕더위가 절정이던 8월 초 국립공원 오대산 월정사로 이어지는 숲길에 들어섰다. 웅장한 전나무숲길이다. 무더위에 지친 몸에 시원한 청량감이 먼저 전해졌다. 숨쉬기 편한 쾌적함과 정신을 맑게 하고 기분을 좋게 하는 향긋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사람과 친숙해진 다람쥐가 도망가지 않고 먹을 것을 기대하며 물끄러미 바라본다. 평화로운 모습이다. 하늘로 치솟은 나무의 경관과 계곡의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도 들린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모든 게 어우러진 ‘국민 전나무숲’이 맞다.
전나무는 추위를 잘 견디고 비교적 빨리 생장한다. 줄기는 강하지만 뿌리는 빈약한 편이라 군락을 형성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뿌리의 엉킴으로 모진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고 견뎌낸다. 협력의 중요성을 알고 실천하는 나무이다.
같은 소나무과(科)이며 양수인 소나무나 잣나무와 다르게 줄기가 휘지 않고 곧게 자랄 수 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전나무는 음수이기 때문이다. 그늘에서도 비교적 잘 자라 햇빛에 따라 줄기가 굽어야 하는 양수와 구별된다.
원추형 형태의 전나무 가지를 바라보면 떠오르는 것이 크리스마스트리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탄을 알려준다. 중세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그 유래에 대하여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그리고 이야기 중심에는 늘 전나무가 있었다. 긴 삼각형인 크리스마스트리가 화살표처럼 하늘을 향하여 종교적 신념을 드러낸다.
20세기에 들어와 더 유명해진 나무는 구상나무다. 영어명 ‘Korean Fir’로 한국 전나무라는 뜻이다. 구상나무도 전나무이며 한라산 등 고산지대에만 자생하는 토종이다. 서양인의 눈에 띄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 크리스마스트리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1998년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가 있었다. 불치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자와 그의 삶에 들어온 여자의 이야기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불균형은 아마도 비교 효과일 듯하다. 8월과 크리스마스는 여름과 겨울을 상징하고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구성이다.
도시의 조경수인 전나무의 운명도 영화 같다. 공해에 특히 약하여 영화 속 주인공처럼 불치병을 앓고 있는지 모른다. 세월이 흐르면 도시에서 사라질 수 있다.
구상나무 역시 기후변화로 인한 멸종위기종이다. 실제로 많은 개체가 고사(枯死)한 현장이 TV에 방영되어 논란이 되었다. 미래에는 식물원에서나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영화와 같은 결말이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은 오롯이 인간의 몫이다.
전나무의 기세는 늘 당당하다. 크고 높은 아름드리의 단순함과 하늘과 땅을 이어놓은 경관이 그리워 다시 그 숲을 찾게 된다. 무엇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 인류에게 희망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사실이 잔잔한 감동으로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