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
다른 사람과 편안한 대화를 하려면 좋은 주제를 나누어야 한다. 그런데 부정적인 말을 해도 문제 되지 않는 얘깃거리가 있다. 날씨 이야기다. 더위와 추위는 ‘공공의 적’이라 이를 탓해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변덕스러움을 비난하며 서로 건강을 걱정해 주면, 친근감이 더 생긴다.
이상기후의 여파로 날씨 변화가 심각한 오늘날과 달리 예전에 우리나라는 비교적 계절이 뚜렷했다. 그래서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처럼 사계절의 호불호(好不好)가 대화의 단골 질문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여름이 무조건 좋았다. 먹거리가 풍족해서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방에서 걸레가 얼던 겨울은 싫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여건이 달라졌다. 환경 변화로 좋고 싫음에 대한 선택은 중요하지 않다. 그냥 지금 덥거나, 추위를 느끼는 순간이 불편할 뿐이다.
오래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친구와 차를 타고 서울로 가고 있었다. -15℃에 육박하는 몹시 추운 날이었다. 그런데 출발할 때는 몰랐는데 한기가 느껴졌다. 그 기운이 서서히 커지고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났다.
히터가 고장 난 것이다. 시간 약속이 되어 있어 지체할 수도 없었다. 추위를 감내하며 계속 달렸다. 스며드는 맹추위의 고통 속에서 누구랄 것도 없이 한심한 말이 튀어나왔다.
한여름에 에어컨을 끄고 창문 닫고 달려보자고 했다. 에어컨 없는 한여름과 히터 없는 한겨울의 고통을 비교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때가 왔다. 한여름에 그 길에 들어섰다. 에어컨 끄고 창문을 닫고 달렸다. 예상대로 사우나 체험이었다. 그렇다면 극한의 더위와 추위 중 언제 더 고통스러웠을까?
굳이 답을 말하자면 지금이다. 몸이 느끼지 않는 추위나 더위를 상상하는 건 무의미하다. 내 몸의 체온조절중추는 지금 느낄 수 없는 온도를 고통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당장의 고통이 전부이다.
한겨울에 접어들면 사람들은 올해가 무척 춥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 올해만 그런 게 아니며 겨울은 원래 춥다. 그래서 추위를 견디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추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게 최고의 추위 사냥이다. 추위는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내 몸이 덜 느끼게 막아 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