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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Sep 12. 2021

영상 인류학으로 본 일곱 개의 세계

제3회 KIEFF 한국국제민족지영화제

 

 9월 9일~11일에 제3회 KIEFF 한국국제민족지영화제가 열렸다. 인류학적 시선·관점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한국국제민족지영화제는 전 세계 73개국에서 출품된 436편의 작품 중 7편을 선정하여 유튜브로 상영했다. 7편의 작품은 각 지역·문화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들을 조명한 후, 이를 '로컬' 문제에서 '지구적' 문제로 번역하고자 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룬 영화들이지만 세계화, 사라져 가는 것들, 성평등, 국가·자본의 폭력 등의 문제의식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포개지는 경우도 있었다.



바다의 신부(La Madonna Del Mare)

발렌티나 란시(Valentina Lanci) | 2019 | 노르웨이 | 30min | Color

  주인공 안나 마리아는 ‘바다의 신부’로 불린다. 젊은 시절 청혼을 여러 번 거절하고 바다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안나는 어업이 그저 직업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1936년생 안나는 이탈리아에서 남녀의 권리가 형식적으로나마 동등해진 이후에 선박 면허를 취득했다. 여자인 그가 금방 포기할 거라는 사람들의 예상은 틀린 것이었다. 오히려 최후까지 남은 건 안나였다.


  동료 어부들은 마을을 떠났고, 취미로 낚시를 하는 사람보다도 물고기를 못 잡을 만큼 바다 상황은 나빠졌지만, 안나는 멈추지 않는다. “사람과 달리 바다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그가 바다와 오랜 세월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짐작케 한다.


  안나를 사랑하며 따르는 그녀의 어린 조카손주들은 안나의 삶·시간을 품은 채 안나와는 다른 세계를 살아갈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한 여성, 직업인의 뚝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따뜻한 포개짐을 보여주기도 한다.



생명을 구하는 사람들(Wave of Saviour)

리키 라하디(Ricky Rahadi) | 2019 | 인도네시아 | 16min | Color

  교통 체증이 심한 인도네시아에서 앰뷸런스 에스코팅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불법이다. 앰뷸런스 에스코팅이 경찰의 업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앰뷸런스가 꽉 막힌 길에서 발을 동동 구를 때 경찰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 앰뷸런스 에스코팅 자원봉사대 RPAI가 나타난다. 그들은 선의에 기반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생명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한다.


  〈생명을 구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공백과 그 공백을 메우려는 시민들의 선의 사이에 긴장이 발생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이 아이러니는 권위주의적 체제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질문하는 데로 나아간다. 어쩌면 국가기관은 시민의 편의가 아닌 체제 증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초우아-초우아”, 생존 전략

(“Tchoua-tchoua”, survival strategy)

로비 라이오(Robi Layio) | 2018 | 카메룬 | 25min | Color

  영화는 극단주의 테러단체 ‘보코 하람’이 야기하는 위험, 불안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보코 하람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로부터 주민들을 지켜주겠다고 파견 나온 사람들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보코 하람이라는 혐의를 씌운다. 이렇게 카메룬 차드(Chad) 호숫가 주민들의 불안은 이중화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멈추지 않는다. 영화가 주목하는 건 제대로 외양조차 갖추지 못한 허름한 시장에서의 상업행위다. 말린 물고기를 두고 오고 가는 거래, 협상, 교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시장의 얼굴을 보여준다. 여기서 시장은 폭력적 착취의 무대가 아닌 사람들이 관계와 삶을 이어가는 장(field)이다. 이것이 단지 시장의 초기 단계에서만 가능한 현상인 것인지, 시장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냥 서핑이나 해라(Just Go Fucking Surfing)

줄 헤셀베르스(Juul Hesselberth) | 2019 | 네덜란드 | 27min | Color

  남자 서퍼는 순수히 실력으로만 후원사를 구한다. 그런데 여자 서퍼는 여기에 하나의 기준이 더 추가된다. 바로 외모다. 비키니를 입고 성적인 암시를 줄 수 있는 여성 서퍼만이 안정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다. 〈그냥 서핑이나 해라(Just Go Fucking Surfing)〉라고 점잖게 번역된 영화의 제목은 업계의 ‘관행’을 거스르는 여성 서퍼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레즈비언 서퍼, 머리를 짧게 깎아 남자로 보이는 서퍼, 50이 넘은 살찐 서퍼들은 그저 행복하기 위해 서핑을 한다. 남들에게 예쁘게 보이도록 꾸미는 일이 서핑의 정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기업에 후원받지 못하는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프로 서퍼에 아닐까 싶었다.



그리운 내 고향(Home Soon Come)

호프 스트릭랜드(Hope Strickland) | 2020 | 영국 | 22min | Color

  카리브해 자메이카에서 영국 맨체스터로 건너온 흑인 노인들의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켜 보여주는 이 작품은 평온한 지금의 시점에서 때로는 역동적이고 때로는 고달팠던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럼으로써 노인이 품은 시간의 깊이, 이주(migration), 제국주의의 문제에 대해 고민케 한다.



하늘 마을(Village in the Sky)

라메쉬 홀볼레(Ramesh Holbole) | 2018 | 인도 | 20min | Color

  인도의 한 가난한 마을인 아가스와디(Agaswadi)에서는 비가 얼마나 오는지에 따라 마을의 운명이 좌우된다. 농작물을 키워 굶어 죽지 않고 최소한으로 먹고살려면 비가 어느 정도는 와줘야 한다. 그런데 비는 오지 않는다. 가난, 젊은 인구 유출로 인한 고령화, 풍력발전회사의 착취 등 이 마을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점점 늘어만 간다.


  영화의 마지막, 마을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여 현 상황을 개탄한다. 그리고 집단행동을 결의해야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임을 다소 격정적으로 논의한다.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각성과 비 내림의 극적인 겹침은 국가의 무능과 자본의 횡포에 대항하는 힘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비의 선교사(Misioneros del temporal)

히메나 파즈 | 2019 | 멕시코 | 20min | Color

  멕시코 고원지대 마을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기우제가 전 세계 강수량을 조절한다고 믿는다. 이들에게 기우제는 단순히 ‘우리 마을에 비를 내려 풍년 들게 해 달라’는 소박한 소망 그 이상이다. 포포카테페틀(popocatѐpetl) 화산을 교회 삼아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은 자못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그렇다. 마을 주민들은 젊은 사람들의 뚱한 표정에서 성스러운 일이 오래도록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슬프게 예감한다. 이때 사라지는 건 단순히 한 마을의 전통이 아니라, 전 인류를 공동체로 보는 관념(모두를 위한 기우제)인 것만 같아 아쉬움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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