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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un 10. 2022

'2022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스케치

  올해 6월 2일부터 8일까지 진행된 서울국제환경영화제의 출품작 7편을 디지털 상영관에서 봤다. 익숙한 방식으로 울림을 주는 영화도 있었고, 신선한 자극을 주는 영화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굉장히 유의미한 영화경험이었다.



1. 애니멀(Animal)/시릴 디옹/프랑스/2021


  영화의 주인공은 기후정의를 촉구하는 활동가인 열여섯 살의 벨라, 비풀란이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여섯 번째 대멸종을 멈출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찾아 세계 곳곳을 누빈다. 이론, 운동/삶의 태도, 정치, 경제 시스템, 인간의 욕망, 탈성장, 자연과의 교감‧공존 등의 이슈를 대하는 두 청소년 활동가의 고민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이들의 여정은 이렇게 많은 분야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기후정의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감동과 더불어 도대체 왜 청소년들이 분노와 좌절로 괴로워해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서구에서는 유독 기후‧환경 영역의 청소년 활동가가 자주 조명되는 것 같다. 이는 과거의 관습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청소년들만이 망해버린 세상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조 섞인 진단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2. 리버(River)/제니퍼 피돔/호주/2021


  윌렘 데포가 내레이션을 맡은 다큐멘터리 영화. “억겁의 시간 동안 자신의 법만 따랐던 (강)물”이 품은 아름다움을 경이로운 촬영기술로 담아냈다. 그 어떤 블록버스터보다 압도적이어서 일종의 숭고함sublime을 자아내는 장면들이 인상 깊다. “영겁의 시간을 흘렀으나 수십 년 만에 (인간에 의해) 멈추게 된” 강 앞에서 인간의 개입은 지독히 하찮아진다. 자연에 주인 행세를 하는 인간이 지구를 잠깐 지나가는 불쾌한 손님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줘서다. 강과 (강이 될) 구름을 담은 몇몇 장면은 정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3. 개미와 베짱이(The Ants and the Grasshopper)/라즈 파텔, 잭 파이퍼/미국, 말라위, 영국/2021


  아프리카 말라위에 사는 아니타 치타야.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니타는 희생자가 아닌 혁신가로서 기후위기 최전선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납치 결혼을 당했지만 현재는 남편과 동등한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그는 마을에서 단체를 꾸리고 젠더 개념을 교육하며 남녀의 동등한 노동분담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 활동가이기도 하다. 암울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길어내는 그지만 메마른 강, 점점 길어지는 건기, 필요량 이상으로 쏟아지는 느닷없는 폭우 앞에서는 고민이 많다.

  명백한 기후위기의 증거 앞에 선 아니타는 기후위기를 촉발한 데 큰 책임이 있는 미국인들을 만나러 간다. 그러나 미국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는 아니타의 여정은 순조롭지만은 않다. 생활양식과 관념의 거대한 차이가 아니타가 ‘기후위기’라 부르는 것을 미국인들이 ‘날씨’의 문제로만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점점 말을 잃어가는 아니타. 그래도 영세농들의 초국적 연대를 꿈꾸는 그는 단단한 말을 벼려낸다. “이 나라(미국)는 모든 걸 가졌고 사람들은 그걸 당연시해요.” “말라위에 사는 우리도 같은 지구에 살고 있어요.”



4. 우리의 방주(Our Ark)/데니즈 토르툼, 캐스린 해밀턴/네덜란드, 미국, 터키/2021


  가상세계를 현실로 복제해 지구를 백업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 그들은 사라질 위기에 있는 것부터 시작해 동물과 환경을 3D로 복제한다. 그럼으로써 망해가는 세계의 대안인 평행우주를 마련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들이 ‘시뮬레이셔니즘’이라 부르는 다른 세계로의 이행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는 손쉬운 도피처에 그치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3D 복제를 아카이브 정도로 의미화하는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5. 유칼립투스(Mata)/파비오 나시멘토, 잉그리도 타드네스/브라질/2021

  수많은 나무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감정이 속임수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오히려 숲이 생명이 아닌 죽음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유칼립투스 조림사업이 선주민 부족과 인근 영세농의 삶의 터전을 앗아가고, 과밀도로 심어진 유칼립투스가 주변의 수원을 말라붙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연구자가 말하듯 땅을 메마르게 하는 건 유칼립투스가 아닌 경영전략이다. 적당히 심는다면 유칼립투스는 선주민, 영세농, 다른 식물과 공존할 수 있다.

  유칼립투스로 휴지 같은 일회용품을 만드는 기업은 열대우림의 황폐화가 유칼립투스가 아닌 기후위기 탓이라고 말한다. 왜 기후변화가 오는지를 질문하지 않고, 자신들의 탐욕에 면죄부를 주는 기만적 포괄어로 기후변화를 운운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울창한 숲마저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없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6. 스웨덴의 겨울(Tracks)/카이사 마따, 빅토르 비에른스트룀/스웨덴/2022


  그들이 느끼는 겨울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눈부신 설원에서 보드를 탈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자연에 폐를 끼치지 않고 즐기는 스웨덴 보더의 모습은 인간과 자연 관계에 있어 하나의 모범이지 않을까 싶다. 그토록 아름답고 거대한 자연을 망치지 않고 그 위에서 행복한 인간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극지방의 눈은 지구의 냉각 시스템 역할도 한다. 하얀 눈이 빛을 대부분 반사하여 지구가 더워지는 걸 방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눈이 녹아 검은 땅이 드러나면 냉각 시스템은 중단되고 온난화는 가속화된다. 스웨덴의 겨울이 더는 짧아져서는 안 될 것 같다.



7. 지평선(The horizon)/에밀리 카르팡티에/프랑스/2021


  기후위기와 멜로를 결합한 흥미로운 극영화다. 멜로영화의 핵심은 세계의 확장이다. 상대방이 아니었으면 경험해보지 못했을 세계를 사랑의 이름으로 탐험하고, 그 세계에 매료되어, 끝내 단단한 경계를 가로지르는 자들의 이야기 말이다. 〈타이타닉〉의 로즈가 귀족이라는 지위(신분), 약혼자의 경제력(계급)을 버리고 가난한 잭과 사랑에 빠져 그의 세계로 진입해 진정한 자유를 찾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실화에 모티브를 얻은 이 영화는 ‘드림시티’라는 거대한 레저 시티가 지역 영세농의 생존과 기후정의를 위협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아르튀르는 철거 위기의 농장 출신이지만, 아프리카에서 이주해온 아자는 도시생활의 편리함을 누리며 자랐다. 그러나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위계화된 방식으로 관계 맺던 둘은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어느새 가까워진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로맨스의 장소는 아르튀르의 공동체다. 아자는 아르튀르와 사귀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자신이 누려온 안온한 세계에 의문을 품는다. 아르튀르의 세계에 진입한 아자가 활동가로 거듭나는 과정이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기후위기’를 둘러싼 세계관의 차이가 서로 다른 신분‧계급의 두 주인공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로맨스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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