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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Mar 10. 2022

끝내 연대하지 못하고 흩어진 청춘을 위한 영화

영화 〈천국보다 낯선〉 리뷰


  〈천국보다 낯선〉은 방황하고 엇갈리는 청춘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포착해낸 수작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지 거의 40여 년이 지났기에, 청춘들이 마주하는 영화 속 현실과 2022년의 현실의 구체적 모습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청춘이 본질적으로 흔들리며 걸어 나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영화의 성취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 무료하면서도 뜨겁고 잔뜩 희망에 부풀다가도 허무해지는, 영화가 포착한 청춘의 순간들을 살펴보자.


  헝가리 출신 벨라는 뉴욕으로 건너와 이름을 윌리로 바꾸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는 헝가리에 남은 가족이 자신을 ‘벨라’라고 부르거나 자신과의 대화에 영어가 아닌 헝가리어를 사용할 때마다 화를 낸다. 마치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누군가 환기할 때마다 ‘기회의 땅’ 미국에서 펼쳐질 미래가 어그러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런데 어느 날 헝가리에서 먼 친척인 에바가 찾아온다. 윌리는 그녀가 자기 집에 머무는 것이 마뜩치 않지만 가족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에바를 집에 들인다. 에바가 윌리의 집에 머문 건 단 10일 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윌리는 에바에 대한 반감을 거둔다. 어딘가 쿨하면서도 다정한 또래의 사촌을 보며 그녀가 자신과 같은 존재, 즉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에 기대 자신만의 방식으로 콧대 높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란 걸 알아봐서다. 윌리의 미국인 친구 에디도 에바를 마음에 들어 한다. 에디가 에바를 좋아한 건 그녀의 예쁜 외모 때문이었긴 했지만 말이다.



  에바가 돈을 벌기 위해 클리블랜드로 떠나는 날, 윌리는 그녀에게 원피스를 선물한다. 에바는 원피스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윌리가 상심할까봐 그 옷을 입는다. 그러고는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를 벗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이 장면은 청춘이 젠더화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고작 '예쁜 원피스'를 선물하는 것으로 동질감을 느낀 에바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윌리의 척박한 상상력에서, 비슷한 처지의 청춘일지라도 젠더 측면에서는 위계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에바가 떠난 후 1년의 시간이 흐른다. 윌리와 에디는 여전히 사기도박, 경마 등에 시간과 돈을 쓰며 방황하는 중이다. 그러다 문득 에바를 보러 클리블랜드로 떠나기로 한다. 마치 에바를 다시 만나면 자신들의 무료하고 한심한 일상에 큰 반전이 생길 것만 같다는 기대를 품고서. 에바도 오랜만에 윌리와 에디를 만나 잔뜩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핫도그 가게에서 일하는 건 그녀가 꿈꿨던 미국생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이 나 따뜻한 플로리다로 여행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가장 큰 좌절은 가장 큰 희망의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다. 윌리와 에디는 여행경비를 개 경주 도박에 걸었다가 몽땅 날려버린 후, 분노에 차 불안해하는 에바를 소외시켜버린다. 여행은 함께 떠났지만, 위기 대처는 남자들만의 영역인 듯 군 것이다. 윌리가 에바에게 원피스를 선물하며 보였던 낡은 젠더 관념이 위기의 순간에 또 한 번 드러나 이들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상황. 불행 중 다행으로 이들은 다시금 우연히 큰돈을 얻지만, 이미 박살 난 관계는 다시 봉합되지 못한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밝은 미래를 꿈꾸는 청춘들이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뿔뿔이 흩어지고 마는 모습을 인상적인 플롯으로 연출해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세 주인공의 허무함‧허탈함을 관객에게도 전이시킨다.



  왜 청춘들은 연대하지 못하고 부유하다 흩어지는 걸까? “우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우리 지금 뭐 하는 거냐?”, “이제 어쩌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공장에서 일하는 게 상상이나 되냐”는 말을 하는 에디와 윌리. 맘에 들지 않는 원피스를 바로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로 당당하면서도 지질한 남성 친구들과 어울리는 에바.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들은 덧없는 삶의 어느 한 단면을 공유하지만, 이를 공통의 자원으로 모아내지 못하고 끝내 혼자가 된다. 1~2분 단위의 짧은 흑백 숏이 단절되듯 이어지는 영화의 독특한 스타일도 서로 연결되지 못하는 청춘들의 쓸쓸한 모습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이제 남은 건 우리는 연결되지 못했다는 쓸쓸한 사실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능성은 바로 이 실패의 지점에서 솟아난다. 우리가 아무것도 성취하지도, 바꿔내지도 못했다는 자조 혹은 외톨이가 되어버렸다는 자각. 이 패배감이 공허한 장밋빛 전망이 사리진 자리를 채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공통 토대다. 이 실패했다는 공통 감각이 우리를 아직 도달하지 못한 ‘낯선’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서로의 이름을 가슴에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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