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라벤더 스케어〉
1953년 미국의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가 내린 첫 번째 행정 명령은 공직 사회의 퀴어 색출령이었다. FBI가 동원된 대대적인 퀴어 색출 작전으로 수천 명의 공무원이 직장과 미래를 잃었다. 수법은 간단했다. 어느 날 갑자기 양복을 입은 두 명의 남성이 사무실에 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다. 그러고는 당신이 퀴어라는 증거를 확보했음을 알리며 사실 여부를 인정하는지를 묻는다. 어쩔 수 없는 증거 앞에 당사자가 수긍하면 그는 직장을 떠날 것을 종용받는다. 당사자는 아웃팅이 두려워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라벤더 스케어〉는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일이 가능했는지를 좇는다. 아이젠하워는 공직에서 일하는 퀴어들이 사생활을 폭로하겠다는 소련의 협박에 굴복해 국가 기밀을 유출하는 걸 방지하겠다는 명목으로 이 모든 일을 자행했다. 물론 아이젠하워 혼자 한 일은 아니다. FBI는 아이젠하워의 손발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조력자는 따로 있었다. FBI는 늘 두툼한 자료를 갖고 퀴어 당사자를 찾아갔는데 FBI가 아무리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조직이라도 모든 공무원을 사찰할 수는 없다. 아이젠하워와 FBI는 자발적으로 동조하는 시민 덕에 자기 목표를 수월히 달성할 수 있었다. 미국인은 퀴어를 색출해 ‘애국’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동료와 이웃의 비밀을 FBI에 제보했다. 황당하게도 “직감”, “부드러운 악수” 등이 그 근거였다.
요컨대 공직 사회의 성소수자 색출은 소련과 경쟁하는 미국(인) 정체성의 핵심에 있는 행위였다. 공산주의의 위협(Red Scare)은 퀴어의 위협(Lavender Scare)이 되고, 이들은 순서를 바꾸며 서로를 강화했다. 국가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공산주의와 퀴어는 사실 국가를 가능케 하는 요소였던 셈이다.
퀴어가 아웃팅과 협박이 무서워 국가 기밀을 유출하는 게 걱정이었다면 퀴어 친화적인 사회를 만들면 된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정치인과 미국 국민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퀴어한 삶이 그들이 상상 가능한 범주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로 옆 동료, 이웃이 퀴어였음에도 말이다.
퀴어 공직자가 비밀 정보를 취급하는 걸 금지하는 조치는 클린턴 행정부에서야 해제되었다. 그리고 이 변화를 가능케 한 사람들이 있다. 영화는 FBI와 대중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운 사람들의 모습도 담아낸다. 전반부보다 긴장감이 덜하기는 하지만, ‘정숙한 시민’의 범주를 넓힌 싸움의 역사를 다소 나이브하게 톺는 작업은 공무원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장치였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2018년 동성애자 A 대위 색출 사건이 떠올랐다. 장준규 육군참모총장이 직접 나서 진행한 군대 내 동성애자 색출 작업 말이다. 라벤더 위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고민은 ‘라벤더 위협’의 내용과 방향을 재조정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
*이 영화는 2022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미국 퀴어 시네마 특별전' 상영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