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시발점〉, 〈뻘〉
이청준의 소설 〈병신과 머저리〉를 원작으로 하는 1969년작이다. 한국 최초의 게이 영화라고 한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나지 얼마 되지 않은 때, 즉 남성성의 공백기였다. 젊고 건강한 남자는 전쟁에서 사망했고 남은 남자들은 너무 늙거나 어린, 전쟁으로 장애를 얻은 남자들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4‧19의 정신을 민족 국가 건립이라는 보수적 욕망으로 재확립한 박정희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즉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의 남성들은 전쟁으로 상실한 남성성을 다시 회복하라는 요구에 직면한 상태였다.
전쟁의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형과 계속 결혼을 미루며 애인을 ‘책임’지는 걸 미루는 동생. 이들은 모두 일종의 무기력과 방황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인데, 형제는 동시대 모든 남성의 모습과 닮은 데가 있다. 형은 소설로, 동생은 그림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형이 끝내 상처를 ‘극복’하는 데 성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반해, 동생은 자신이 마주한 난국을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 동생은 형처럼 전쟁이라는 직접적인 트라우마의 원인이 없는 데도 그렇다.
영화의 표층은 그 무엇도 책임지기를 거부하는 동생을 조롱한다. 연애 중인 여자가 강간을 당하는 데도 자신이 나서면 그 여자를 책임져야 할까 싶어 망설이는 동생의 모습은 그의 무력함이 곧 한심함의 다른 이름임을 강력히 규탄한다.
그러나 심층에는 다른 메시지가 있다. 동생의 무기력이 민족 국가의 욕망에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면? 분명히 존재하던 퀴어 욕망을 거세해버린 후 사회로 복귀하는 형에 대한 반항이라면? 자신의 욕망이 여자가 아닌 대상으로 향하고 있음을 호소하는 수단이었다면? 형과 달리 전쟁을 겪지도 않았는데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동생의 병증은 무력감이 아닌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수동적인(그러나 적극적인) 거부의 몸짓이 된다. 사회에 ‘도태’되고 ‘부적응’한 동생에게서 우리 현대사가 쓰이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판이한 역사를 가졌을 것이다. 동생에서 시작하는 우리 역사의 새로운 ‘시발점’을 적극적으로 상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에이즈에 감염된 여성 ‘지나’가 죽음을 예감하고 포토그래퍼로 일하는 남자 ‘무중’과 동침한 후 사라진다. ‘죽음의 동반자’로 무중을 선택한 것이다. 콧대 높고 자신감 넘치던 무중은 엄청난 혼란과 공포에 빠진다. 공들여 쌓은 커리어를 한 순간에 포기하고 자신에게 에이즈를 옮긴 여자를 찾아다니고, 미국으로 건너가 에이즈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행복이 더는 불가하다는 체념을 공유한 두 남녀는 재회하여 죽음을 주제로 사진 작업을 이어간다. 비참하게 자살하는 여자와 사랑을 되찾는 남자라는 결말에서 드러나듯, 에이즈라는 ‘죽음 선언’을 마주한 두 남녀의 젠더에 따른 차이는 영 거슬린다. 한국에서 최초로 에이즈를 다룬 영화라고 하는데 당시 에이즈 담론이 어떠했는지, 영화가 에이즈 감염인의 고통을 어떻게 재현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감상한다면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연출한 이만 감독의 자의식도 흥미롭다. 영화 앞뒤로 장황한 예술론을 자막과 내레이션으로 선보이는 그는 기존 한국 영화에 강한 불만을 표출하며 자기 영화의 예술성을 강조한다. 심지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볼 수 있는 당시 홍보영상은 ‘무식한 사람은 이해 못 하는 전혀 다른 영화’, ‘기존 영화에 대한 부정이며 반란’, ‘저질 관객 입장 사절’ 등의 문구를 활용해 영화를 홍보했다. 그래서일까? 영화에는 예술 영화에서 볼 법한 독특한 장면들이 나온다. 미라처럼 붕대를 감은 지나와 무중의 성관계, 벌거벗은 남녀의 현대사회 고발 퍼포먼스 등등. 그 장면의 ‘예술성’은 차치하고라도, 강한 예술적 자의식을 가진 감독이 에이즈를 소재로 현대 사회의 혼란한 단면을 그려내고자 했다는 점은 다시금 동시대 에이즈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질문케 한다.
*〈시발점〉과 〈뻘〉은 2022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스페셜프라이드' 상영작입니다.